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박 Apr 17. 2016

피로에 대한 오해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고...

긍정적인 마음과 사고방식으로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잘 사는 법"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부정적인 마음이나 사고방식은 흔희 말하는 "질 수밖에 없는" 루저(Loser)가 되는 지름길이고, "쉰다"는 것은 기회 박탈 및 뒤쳐짐의 표상이다. TV에서는 수많은 피로회복제 회사들이 "열심히 일하면서 쌓인 피로는 날려버리고 다시 긍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밤낮으로 외친다. 이렇게 긍정과 열정에 환각 되어 있는 21세기의 어느 날, 독일에서 한 한국이 교수가 짧고 간결한 책을 통해 얘기한다. "피로야말로 쓸모없는 것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저자 한병철 교수는 21세기는 20세기의 규율 사회가 성과사회로 변모된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라고 말한다. 규율과 성과. 전자의 단어에서는 구식의 구속을, 후자의 단어에서는 신식의 자유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사회에도 진정한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진정한 자유를 위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저자는 짧고 압축적인 문장들로 설명하고 있다.


규율 사회란, 복종에 익숙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며 만들어낸 사회이다. 이 사회 속에는 정상과 비정상이란 이분법이 존재하고, 비정상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정적인 것을 "해서는 안되고", 긍정적인 것을 "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명령, 금지, 법률 등이 지배적이다. 이를 참지 못하거나 어기는 이들은 "미쳤다"거나 "범죄자"라고 규정된다. 그러나 "열심히" 일해서도 더 이상 생산할 것이 없는 시대가 도래했고, 이때 지배 권력은 권력 옹호를 위한 새로운 슬로건을 내세운다. "Yes, we can!(우리는 할 수 있다!)". 바로 성과사회의 등장이다.


성과사회는 얼핏 이상적인 사회처럼 보인다. 이 사회에는 규율 사회와 달리 규제도 없고, 정상/비정상의 구분 없이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또한 명령, 금지, 규율 등의 제한보다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 등의 "열린 기회"들만 가득하다.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이 사회에는 참으로 아이니컬한 현상이 벌어진다. 수많은 낙오자와 우울증 환자들이 생긴다는 것! 사회 자체는 여기에서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외치지만, 정작 그 안에 살고 있는 개인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압박의 주체가 타인이 아닌 "자신"이라는 것이다. 성과사회 속의 개인은 끝없는 열린 기회 속에서 스스로 자유롭다는 "착각"에 풍덩 빠진 채, 긍정이라는 비타민을 주입받으며, 원하는 성과(실제로는 이루기 어려운)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해서 달린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기대했던 성과는 보이지 않고,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길 위에서 탈진하고야 마는 개개인으로 가득 찬 사회, 이것이 긍정성의 과잉이 만들어낸 역설적 자유의 결과다.


긍정이 흘러넘치는 사회는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잠과 심심함을 참지 못하여 깨어있는 생활과 멀티태스킹을 요구한다. 둘째, 인내와 지속 불변의 가치를 믿지 못하여 활동적인 생활과 건강한 삶의 유지에 집착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부정하거나 중단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여 모든 자극의 수용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게 한다. "깨어있는 생활", "멀티태스킹", "활동적인 생활", "건강한 삶", "모든 자극의 수용", "끊임없이 나아가기". 이들은 우리 스스로, 주변에서,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미디어에서 부르짖는, 잘 사는 법을 대표하는 키워드들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치고 우울하고 피곤한 것인가?


"깨어있는 삶"과 "멀티태스킹"은 잠이라는 육체적 이완과 심심함이라는 정신적 이완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는 분주하고 반복적인 활동을 강요하여, 사색과 창조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걷다 보니 심심한 어떤 이가 춤이라는 성과와는 무관한 행위를 창조하였을진대, 각성된 빡빡한 생활 속에서 과연 이런 사치가 가능하겠는가? 성과사회의 상식에서는 아무 가치도 없는 춤이 실제로는 무한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활동적인 생활"과 "건강한 삶"에 대한 동경은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착취를 요구한다. 성과 없는 노동 끝에 느껴지는 존재에 대한 허무를 채우고자, 초조하고 부산스럽게 무언가를 하려 하고, 뒤늦게 아까운 자신의 몸을 돌보기에 여념 없는 한 개인의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어떠한 지배도 없이 스스로를 쉬지 못하게 착취하는 기묘한 현상... 자기계발이란 명목 하에 쉬지 않고 취미를 찾고, 이를 위해 다시 돈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일하다가 망가진 몸을 관리하기 위해 또 돈을 필요로 하는 끝이 없는 쳇바퀴...


"모든 자극의 수용"과 "끊임없이 나아가기"는 어떤 자극에 대해 잠시 생각하거나, 속도를 늦추거나, 중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긍정이라는 명목 하에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요하고, 사색 없는 프로세싱과 아웃풋 도출을 요구한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해탈하고 열반하고자 하는 참선(道)의 성질과는 다르다. 참선이란 자신이 중심이 되고자 하는 연습으로서, 자극에 대한 "해방"과 능동적 "무위"를 지향한다. 무한한 긍정적 "수용"은 여과 없이 누적되어 짜증과 신경질 같은 불안만 일으킬 뿐, 어떠한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다. 겉으로는 스스로 수용하는 것 같지만, 사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마저 상실하여, 수동적으로 내맡겨지는 개인을 만들 뿐이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성과를 내는 승자가 되기보다 성과가 없더라도 피로한 자가 되는 편을 택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말하는 피로란 평화로운 노곤함, 놀이와 같은 태평함을 의미한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무엇을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지를 사색할 수 있는 태평함은 무위와 느림, 그리고 우회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 우회의 과정에서 창조가 가능해진다. 움켜쥔 것을 놓고,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고, 사물과 타자에 대한 인식의 경계를 허무는 사회에서는 우애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공동체가 형성된다. 반면, 성과사회나 활동 사회가 요구하는 부정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과잉 주입은 극단적인 피로, 탈진, 영혼의 경색 및 사회의 붕괴를 야기할 뿐이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이리도 힘껏 달리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죽음을 무서워한다고 하지만, 실제 죽음 직전의 상황을 상상해 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내가 이루어놓고, 소유한 것들, 좋아하는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데, 꼼짝없이 떠나야만 하는 그 순간의 두려움. 더 이상 함께 갈 수도 없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으며, "어디"라는 것이 있는지도 모를 그 순간의 공포. 그 찰나의 순간을 생각하면, 긴 생애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결정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싱싱하지만 느긋하게 살아가기. 그리하여 지나온 자기 삶에 대한 아쉬움 없이 죽음 앞에서 이승과 쿨하게 작별하기를 목표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지. 놀멍 쉬멍 순간순간을 평화롭게 음미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런 피로사회는 무위(아무것도 하지 않음)도 괜찮다 하고, 쌓인 피로를 나누기 위해 모이라 하며, 함께 하는 놀이의 과정에서 쓸모없는 것마저 쓸모 있게 만드는 힘을 갖게 한다. 내 안의 깊은 피로감을 빨리 발견하여 휴식을 주어야 할 때는 그 어느 때도 아닌 지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리라는 마법의 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