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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박 Mar 22. 2021

글쓰기에 대한 기억

고등학교 수학여행 장소는 경주였다. 당시 국사 선생님은 인자하신 얼굴에 자상한 목소리를 가지신 분이셨는데, 수학여행에 가서까지 숙제를 해오라고 하셨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경주에서 본 '역사'에 대하여 A4 용지 1장에 글을 써내는 것이었던 듯하다. 내가 정확히 어떤 글을 썼는지 잘은 기억할 수 없다. 다만 그 숙제를 위해 불국사며 각종 사찰의 천장과 단청들을 유심히 살피고 메모했던 기억이 난다. 단청 속 분홍 꽃무늬도 기억난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소박하게 보고 느낀 것을 종이 위에 적었던 기억이 난다. 공부라면 그저 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국사수업 내용을 기억하여 그 종이 속에 우겨 넣었을 리는 없다. 국사의 국자도 표현하지 못한 채 그저 보고 느낀 것만을 담백하게 썼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게 일부의 시간을 숙제를 위해 할애했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만난 국사 수업시간. 국사 선생님께서는 숙제를 가장 잘 해온 사람이 직접 나와서 읽었으면 좋겠다며 나를 지목하셨다. 그 당시의 상황 또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국사 선생님은 평소와 같이 인자한 미소를 띄우신 채 창가로 물러나셨고, 나는 교단 위로 올라가 내가 쓴 글을 읽어내려갔다. 이것은 나의 고교 시절 중 가장 풋풋하고 싱그럽게 기억되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학과나 직업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성적에 맞춰 대학엘 갔다. 그리고 대학생이던 시절에였는지, 졸업 후였던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느 날 티비 토크쇼에서 탤런트 정영숙의 대학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숙명여대 국사학과 재학 시절이, 특히 답사를 통한 공부가 얼마나 즐거웠는지를, 그녀 특유의 반달모양 눈웃음을 띤 채 조잘대듯 이야기 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 토크쇼가 선명하게 기억날 정도로 그녀의 재학시절이 부러웠었다. 태정대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 다음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국사에 문외한이면서도 그 날 이후 역사라는 이름의 여행라는 것에 대한 호기심은 줄곧 지니고 살았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본 단청의 색감과 내가 쓴 글의 느낌을 늘 잊지 못한 채 살아왔다.


지금 읽고 있는 책 중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 속에서 글을 잘 쓰는 법에 대해 읽었다. 처음 보는 구절은 아니었다. 유시민 작가의 글 잘 쓰는 법이라는 강의와 글을 SNS에서 이미 여러차례 봐온 터였다. 그와 같이 간결하고 쉬우면서 지적인 글이 쓰고 싶어서 그가 추천한 토지 1부와 이오덕 선생의 바른 우리말에 대한 책도 사두었다. 유시민 작가는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수시로 메모하는 습관이 글 잘 쓰는 지름길이라고 했다.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것은 명확했지만 수시로 메모하는 것은 실행 불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가입한 독서클럽에서 글 쓰고 사는 것이 꿈인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생활을 본 것이 나의 편견을 깨주었다.


그녀는 수시로 자주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강의를 듣고, 그 느낌을 페이스북에 장문으로 올리곤 한다. 선생님이라는 직업 상 퇴근이 정확하고 여유 시간이 있으니 가능할 것이라고,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핑계를 댈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서울과 경기를 오가며 적극적으로 글과 문화를 찾아 즐기고 있었다. 어느 잡지의 칼럼 연재까지 했었다는 그녀의 이력을 모르더라도 그녀의 글솜씨가 얼마나 훌륭한지 그녀의 페북 게시판을 보면 알 수 있다. 글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그녀의 글을 읽어내려가면서 수시로 메모하지 못할 일이 없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글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있다면 그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


다시 나의 기억은 풋풋했던 고교 수학여행 시절로 돌아간다. 국사 선생님조차 그냥 지나칠지 모를 불국사의 구석구석을 글로 옮겨쓰고 싶었다. 답사라는 이름으로 선조들이 살아온 자리들을 살펴보는 국사학과에 대한 로망을 늘 품고 살았다. 즐거운 활동을 일로 삼고, 놀이로 삼으라는 유시민의 조언이 새삼스럽게 가슴 속에 박히는 듯 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내가 보고 느끼는 소소한 것들에 대해 글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결심하고 일터에서 돌아오는 퇴근 길, 용서 고속도로 금토 톨게이트 주변의 벚꽃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고교시절처럼 풋풋하게 느껴지는 저 연두빛, 분홍빛의 야트막한 산부터 묘사하는 글을 써볼까?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향해 달려가볼까?



#글쓰기 #메모하는습관 #유시민 #어떻게살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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