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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May 18. 2020

공무원과 선거

막연한 공포로 맞이한 선거가 내게 남긴 것

"도대체 이걸 하겠다는 거야?"

"말도 안 돼. 우리 다 죽으라는 거잖아"

"방역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설마 마스크랑 장갑은 주겠지?"

"아...이번 투표사무원 정말 빠지고 싶다!"(긴 한숨)


2월쯤이었던가.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공문이 시행된 날. 예.정.대.로 선거는 4월 15일에 치른다는 내용이었다. 수백 명의 공무원들이 투개표 사무원으로 차출된다. 투표사무원들을 위한 세부적인 업무절차가 붙어있는 공문을 읽고 사무실 분위기가 급 무거워졌다. 그러다 내가 그냥 불쑥 내뱉었다.


"도대체 이걸 하겠다는 거야?"

이 말에 조용히 있던 다른 직원들의 푸념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2월이면 한창 바이러스가 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을 때다. 당시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침을 꿀꺽 삼켜서 목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열이 없는지 이마를 만져 보았다. 방역복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보안요원의 발열 체크와 출입증 확인. 그렇게 무사히 사무실로 출근한다 해도 누군가 기침이라도 하면 불안감에 이내 마스크를 다시 한번 고쳐 쓰던 긴장된 분위기가 수 주째 이어지고 있었다.


'설마 선거를 할까'.

사실 난 반신반의했다. 선거 한두 달 전. 직원들 대부분은 이번 선거가 예정대로 치러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예정대로 치러지면 어쩌나 '불안했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이 상황에 수천 명의 유권자들을 좁은 투표소에서 만나야 해? 에이...공무원도 사람인데, 설마 이대로 하겠어. 뭔가 대책을 마련하고 조금 연기해서 치르지 않을까?' 온갖 추측들이 사무실 공간과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선거업무 담당자의 투표사무원 차출 공문은 어김없이 시행되었고, 우리 사무실에서도 나를 포함 전부 6명이 최종 투개표 사무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아 진짜 내가 선거를 하는구나! 코로나 선거!'

그렇게 나는 지난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사무원으로 차출되어 투표소로 출근을 했다. 새벽 4시 반. 투표함을 수령하고 투표소가 있는 중학교 체육관으로 차를 몰았다. 투표소로 가는 10여 분의 시간. 앞서서 달려가는 투표관리관님의 차량을 나는 조금은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다. '오늘 괜찮을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막연한 두려움에 나도 모르게 차량 핸들을  쥐었다.


아직은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시간. OO동 제O투표소 앞. 희미한 불빛 사이로 웅성웅성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음이 급한 투표관리관님은 서둘러 차량에서 투표함과 용품을 꺼내어 곧잘 체육관으로 들어가신다. 나는 10명 남짓의 투표사무원 명단을 꺼내 들고 출석을 확인하고 명찰을 배부했다. 다들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조금은 긴장하면서도 상기된 표정들. 하지만 누구 하나 묘하게 흐르는 그 긴장감을 굳이 표현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그냥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말없이 할 뿐.


주부, 학생, 공무원, 선생님 등등. 하는 일도 나이도 성별도 각기 다른 사람들. 그날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럼에도 이번 선거가 주는 '특별한 공포'를 운명처럼 함께 해서일까. 보이지 않는 연약한 끈이 그날 투표소의 사무원들을 얼기설기 묶어 놓은 듯했다. 사적인 농담도 일상적인 대화도 거의 없었던 공간. 하지만 그 날의 투표소는 내가 경험한 과거의 그 어떤 선거보다 조용했고 또 침착했다. 사무원들도 유권자들도 그랬다.


사실 투표소는 선거 전날 설치된다. 투표관리관으로 지정된 시청의 팀장 한 명과 공무원 3명이 투표 장소인 학교 체육관에 선거 전날 먼저 모였다. 선관위에서 보내온 투표용구함을 확인하고 물품들을 꺼내 정리한다. 실내외 기표소를 설치하고 화살표와 안내문을 붙이는 작업을 전날 오후 동안 하는 것이다. 올해 투표사무원 인원은 예전 선거에 비해 많이 적었다. 하지만 코로나 방역으로 인해 해야 할 일과 챙겨야 할 물품들은 훨씬 더 많았다. 투표소 방역과, 거리두기, 손소독제, 체온계, 일회용 비닐장갑, 자가 격리자 투표를 위한 방역복까지. 여러 개의 박스와 꾸러미가 체육관 한편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올해는 절반의 인원으로 두 배 이상의 일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내가 본 투표관리관님은 조금 남달랐다. 선거교육을 받기 위해 백여 명이 한 곳에 모인 사전 교육장에서의 첫 만남. 그분은 간단한 인사말 외에는 별다른 말이 없으셨다. 투표 전날에도. 투표 당일에도. 밀봉된 투표함을 개표장소로 인계하고 투표소로 돌아오는 호송 버스 안에서도. 그분은 필요한 말 외에는 그다지 말씀이 없으셨다. 공직생활이 몇 년 남지 않았다고 하신다. 수십 번의 선거업무를 해봤다고 하셨다. 그게 내가 들은 그분의  안되는 말씀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틈틈히 선거사무 안내책자를 탁자에 펴놓고 '투표 전날과 투표 당일 해야 할 일'들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하신다.


내가 근무한 투표소는 주민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꾸준히 밀려드는 사람들 그리고 투표소에 스며있는 깊은 긴장감으로. 투표관리관님은 혹시라도 사고가 생길까 책상에 앉아있질 못하신다. 투표시간 내내 투표소 안팎을 들락날락 하신다. 근무 인원이 적어 점심시간 교대가 여의치 않아 나와 맞교대를 해야 하는 상황에 관리관님은 먼저 밥을 먹으라고 하신다. '아 몇 시간만의 휴식인가!'. 나는 투표소 근처 백반집에서 급하게 순두부를 먹어치웠다. 편의점에 들러 캔커피를 사서 들이키면서 잠시나마 투표소 내의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꿀맛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투표소로 다시 돌아간 나는 또다시 매시간 투표인원을 보고하고 투표록을 적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드디어 정각 18시.


"투표를 종료하겠습니다!"

투료관리관님의 단호한 선언과 함께 투표함이 밀봉되고 투표관리관과 나, 참관인 그리고 호송 경찰관들은 대기 중인 호송 버스에 올라탔다. 타 투표소에 비해 조금 일찍 출발했음에도 이미 개표장 입구에는 투표함 인계를 위해 수십 명의 공무원들이 줄을 서 있다. 새벽 4시부터 시작한 긴 하루. 다들 초췌한 모습이다. 하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오늘도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이었을 터. 투표관리관님도 바로 뒤에서 투표함을 들고 조용히 서 계셨다. 잠깐 살편 본 그분의 얼굴도 다소 긴장이 풀린 듯했다. 그렇게 개표장으로 투표함을 무사히 전달하고 돌아오는  안.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한 마디 하신 후 관리관님은 바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신다. 그분 뒷자리에 앉아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과 두어 달 전. 선거가 일정대로 치러진다는 공문 하나. 거기에 발끈해서 불평을 쏟아내며 동료들의 동조를 은근한 유도하던 나의 말 한마디. 바이러스가 가져온 '막연하지만 현실의 공포'. 하나의 선거에 대해 두 명의 공무원이 각기 다른 곳, 다른 시점에서 보인 상반된 반응.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 그냥 경험하지 못한 공포를 다루는 '그릇'의 차이 아니였을까. 나는 그렇게 버스 뒷자리에 앉아 그분 바라보며 공포 앞에 한없이 가벼워져 버린 내 모습을 어둑어둑 희미한 유리창에 연신 비춰보고 있었다.




(이윽고 버스가 투표소인 중학교 교문 앞에 도착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동행했던 참관인과 경찰관들과 작별 인사를 마치고)

"아, 관리관님 혹시 오늘 점심 드셨어요?"(버스 안에서 계속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뭐,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어서 점심은 안 먹어도 돼요. 허허"(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하신다)

"너무 죄송합니다. 제가 챙겼어야 했는데... 저만 먹고 와서 관리관님 점심을 못 챙겼네요"

"괜찮아요. 지금 가서 먹으면 됩니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빨리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신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함께 해야 했던 '선거 공포'는 다행히 무사히 지나갔다. 하지만, 이제 나는 말 한마디가 가지는 '또 다른 공포'를 알아버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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