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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Jun 24. 2020

세상 우울한 20대

'실패한 관계로 인생이 바뀔까'

'실패한 관계로 인생이 바뀔까"

 
'찬란했던 20대'?

사실 그런 건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암울했던 나의 20대'가 정확한 표현이다. 당시 나의 모든 인간관계는 실패로 끝이 났다. 우정도 사랑도 모두.


‘내 인생의 흑역사’.

늘 나는 나의 20대를 이렇게 표현하고 또 회상한다. 40대 중반에 이른 지금.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나의 20대 전부’라고 거침없이 내뱉곤 한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무척이나 선명하게 그 10년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고향을 떠나.

고등학교 졸업 이후 부모님과 계속 떨어져 살았던 나는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탔다. 거기에다 내성적이기까지 했던 나는 몇 안 되는 친구들과의 관계에 의지해 겨우겨우 타지 생활을 버티고 있었다. 그중에서 그 친구는 내가 가장 믿고 따르던 동기였다.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머리는 늘 파마를 해서 풍성하게 풀어헤치고 다녔던 친구. 소심하고 무얼 하든지 항상 망설임이 먼저였던 나에게 그 친구는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일종의 대리만족처럼. 그렇게 대학시절 내내 단짝처럼 붙어 다녔던 친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둘 다 취업을 하고 내가 살던 동네에 그 친구가 처음 놀러 왔다. 직장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그 친구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작은 헤드헌터 회사에서 직원들 급여 업무를 맡았던 그녀는 상사로부터 돈과 관련된 이상한? 요구를 받고 있다고 했다. 직원들 급여를 정상적으로 주는 게 아닌 것 같아 심적으로 괴롭다고도 했다. 20대 초반이었던 그때 나는 정확히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인식하지 못했던 듯하다. 막연하게 ‘힘들겠다’, ‘그래도 어떻게 해. 먹고살기 힘드네...’ 뭐 이 정도로만 위로를 해 주었던 것 같다. 그날 조금은 이른 오후 시간. 사람들로 부산스러웠던 어느 버스정류장에 서서. 창밖으로 고개를 힘없이 내민 친구에게 나는 잘가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친구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왔다.

“회사 일로 문제가 생겨서 잠시 떠나 있어야 할 것 같아. 잘 지내..”

그때 이 문자가 친구로부터의 마지막 메시지일 줄 상상이나 했을까. 막연히 나는 '언젠가 정리되면 내게 연락하지 않을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는 지금까지 나에게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관계를 단절당한 내 인생 최초의 경험이었다. 대학 동창들을 통해 어떻게든 연락처를 알아보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악몽까지 꿀 정도로 그 관계에 집착했다. 친구에 대한 원망과 이유를 몰랐기에 답답함과 서운함 그리고 그리움까지. 온갖 감정의 기복을 꽤 오랫동안 경험했다. 20대 초반. 세상에서 가장 믿었던 누군가가 이유도 설명도 없이 내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나는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점점 내가 만든 동굴 속으로 더 깊이 기어들어갔다. ‘왜 그랬을까’, ‘내가 뭘 잘못했기에’... 그런 원망들로 오롯이 그 시간들을 채웠다. 중간중간 격하게 찾아드는 허무함과 상실감으로 게임중독에 6개월 정도 빠진 적도 있었다. 수개월을 새벽 2~3시까지 게임을 하고 출근을 했다. 당시 일반 회사를 다녔던 나는 책상에서 졸고 있다가 상사에게 여러 번 지적을 받았다.
 
그렇게 나의 20대는.

대학시절 부모님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타지에서 스스로 맺은 첫 인간관계의 실패와 그 후유증으로 철저하게 망가졌다. 회사에서도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이성과의 관계에서도. 20대의 나란 인간은 늘 조금은 ‘붕’ 떠있는 느낌이었다. 처절하게 외로웠지만 그걸 채울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남을 원망하든지 세상을 원망하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렇게 나는 서른 살을 맞이했다.

어느 날 집 근처 스포츠센터 수영반을 등록하게 되었다. 수영이란 운동을 우연히 시작하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그토록 찾던 방법을 터득한 기회이기도 했다. 운동은 뭔가 채워지지 않는 복잡한 감정을 해소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내 속마음을 조금씩 드러낼 기회도 만들어졌다. 운동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의 순수하고 인간적인 소통은 그렇게 나를 어두운 동굴 속에서 세상 밖으로 조금씩 끌어내었다.
 
나의 20대가 왜 그렇게 암울했을까.

사실 깊이 고민해 본 적은 없다. 단순히 지금까지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고 막연히 떠올린 것 뿐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인생 최악의 실패의 시기로 ‘20대’를 정의하고, 그 시간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보니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믿고 의지한 그 친구와의 ‘실패한 우정’이 그 출발점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30대 이후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인간관계’에서 인생의 가장 큰 의미를 찾는 사람이 되었다. 운동으로 조금씩 되찾기 시작한 나란 사람에 대한 고민과 사람들과의 소통은 그렇게 나를 조금씩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세상 밖으로 당당하게 나왔다.

십년이상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만나는 인생 친구도 생겼다. 존경하는 교수님과 직장 상사분들. 그리고, 아끼들 선,후배들과 동기들. 리더십을 함께 고민하는 대학원 원우들까지. 이제 나는 다양한 관계들 속에서 나와 타인을 함께 빛나게 할 능력을 조금씩 기르고 있는 중이다.


20대에 겪은 인생 최악의 관계.

거기에서 내가 찾아야 할 의미를 과연 무엇일까. ‘최악’으로 규정할 정도로 힘들었던 이유는 그만큼 내게 소중한 무엇이라는 반증이 아니었을까.


20대.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10년의 세월과 바꿀 만큼 나에게 소중한 것은 바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것이었다.
 
얼마전에나는.

그 친구 이름 석자를 페이스북 인물 검색창에 입력하고 검색을 꾸욱 눌렀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수 백개의 계정이 우르르 모니터에 다. 사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막연히 살아는 있겠지 생각하며 검색창을 닫아 버렸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마무리되지 못한 실패한 관계에 대한 아쉬움가슴 한편에 가지고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친구에게 고맙다. 10년을 원망했고, 그 후 10년을 또 같은 이유로 방황했건만. 40대가 된 지금 나는 친구에게 고마움과 안부를 전하고 싶다. 같은 하늘 아래 건강하게 두 발 잘 디디고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제야.

내게 이런 다짐을 본다.
‘나름 이유가 있었겠지. 내게 말 못 할...’
 

스무살 친구와의 실패한 우정.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것을 ‘내 인생 최고의 선물’로 바꿀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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