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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Jan 25. 2021

씁쓸한 여자

'차라리 그럴듯한 말로 내뱉지나 말지'

어느 씁쓸한 인터뷰

얼마 전 직장에서 성평등 관련된 비공개 인터뷰에 참여했다. 인터뷰는 전문가와 3명의 직원이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진행자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성의식' 또는 '성평등'에 대한 경험과 느낌을 참가자들에게 자유롭게 물어보고 답하는 시간이었다. 한 시간 남짓 진행된 인터뷰였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씁쓸함만 남겼다.   


먼저 도착한 나와 다른 한분이 편하게 얘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왜 공무원이 되고자 했는지. 공직에 들어와서 느낀 차별적인 요소가 어떤 것이었는지. 불합리하다고 느낀 것과 지금까지 많이 바뀐 것 등등. 직업인으로 생활하면서 겪어온 다양한 경험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런데 번갈아가면서 답변을 할수록 분과 나의 이야기가 조금씩 어긋남을 느끼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잠깐이지만 직원들끼리의 소통의 시간이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소통의 시간이 너무 불필요하고 의미 없는 것이었다고 털어놨다. 나는 여성에 대한 차별도 문제지만 점점 소수가 되어가는 남직원들에 대한 역차별심각해지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는 아직 여성에 대한 차별도 갈 길이 먼데 역차별은 시기상조라고 한다.


이렇게 인식의 차이가 자꾸 느껴지자 나는 그분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동시에 내가 '세상을 너무 좋게만 보는 건가?' 그런 생각도 하면서. 우리 조직에서 그나마 열린 사고를 가졌다고 평가받은 직원을 선별해서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라고 들었지만 그 분과 나의 인식 차이는 꽤나 컸다. 한참을 조직의 불합리한 부분을 성토하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언제부터 조직이든 문화든 모든 상황을 너무 좋게만 또는 편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실 나도 이런저런 불평불만을 털어놓는 걸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아주 가끔은 나도 모르게 불만을 털어놓을 때가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더했다. 마음이 맞는 동료가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런 사람을 욕하든 그런 조직의 문화를 욕하든 불평을 많이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을 겪으면서 나에게 남겨진 건 일종의 '허탈감'이었다. 뭔가 격렬하게 불만과 불합리함을 털어놓으며 서로 긴밀한 공감과 동지애를 느끼기는 한다. 하지만 그건 그때뿐이다. 그렇게 해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욕 실컷 하고 입만 험악해진 그런 찜찜함이 전부라고나 할까. 그리고 차츰 그런 식의 불평에서 나를 떼어놓게 되었다.


사실 인터뷰 시간 내내 내가 느낀 것이 그런 '찜찜함'이었다. 생판 모르는 직원 셋이 한자리에 모이기도 어려운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조직에 대한 불평으로만 채우고 싶진 않았다. 이미 오래되고 지긋지긋한 그저 그런 문화들 고정관념들 편견들. 드라마를 봐도 수많은 책과 웹툰만 봐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현실을 그려놓지 않았는가.


사실 인터뷰에 응하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런 현실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하면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지.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사실 난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자리에 나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내가 뭔가 작은 실천을 이야기하면 건너편에서는 너무 이상적인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렸고 그냥 거기서 멈추었다.


세상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도 저도 아닌 사람 등등 뒤죽박죽 섞인 곳이 아닐까. 나는 내가 발디딘 이 곳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여전히 조직 곳곳에 불합리함이 넘쳐나는 곳이지만 그걸 그저 그런 불평 거리로만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리 되었는지 원인이 궁금하다. 그래야 해결책도 나오니까. 한발 더 나아가 어찌하면 더 많은 사람이 만족하는 일터로 만들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뿐이다. 불평의 말은 그냥 말이다. 그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면 끝인. 그럼 그다음은?


오늘의 톱기사 ; 박원순, 김종철

소위 '말빨' 좋은 정치인이나 지도자들이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서 내뱉는 건 어찌 보면 쉬운 것 아닐까. 반면 그들이 일상에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건 다른 문제다. 실천의 문제는 아무나 건드릴 수도 확신을 줄 수도 없는 문제이기에. 그래서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할 수밖에 없다.


'평등한 성의식을 가져야 한다', '불합리한 차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누구나 이런 말은 할 수 있다. 그럼 평등한 성의식은 어떻게 가지는 것이며 불합리한 차별은 어떻게 하지 않는 것인가. 일상에서 이것들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구체적인 상황과 예시가 나와야 하기에 내가 경험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쉽게 나올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현실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당위성만 얘기하면 되는 거지 그깟 실천이 뭐가 중요하냐고? 중요하다.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그런 다음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안희정, 박원순, 김종철(정의당 대표) 등등. 이런 부류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과 행동의 불일치다. 타고난 화술, 유려한 글솜씨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 등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사회적 이슈를 만들고 스스로를 권력화 시키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들이 사람들 앞에서 그럴듯하게 '지껄이는 말'과 일상에서의 '행동'이 정반대였기에. 그 불일치가 우리에게 가져온 파장은 생각보다 크다. 그동안 수많은 이의 노력으로 만들어 온 성과는 물론 앞으로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까지 발목을 단단히 잡히게 생겼다. 몇 사람으로 인해. 티도 안나는 실천으로 신뢰를 차근차근 쌓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까지. 깊은 절망감을 안겼다. 그래서 그들은 나쁘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기에.


'차라리 그럴듯한 말로 내뱉지나 말지'.

어찌 보면 한없이 나약하고 불안정한 나 같은 보통의 사람에게 그들은 그냥 그들이 될 수 없다. 이제 (그들이 나오기 이전보다) 더 깊어진 불신을 어찌할까. 결국 이런거였나. 오늘  유난히 얼마전 인터뷰에서 만난 그 분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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