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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Jan 24. 2021

골목에서 남몰래 쫄면 먹던 대학생

"학교 이제 그만 다녀라"

"엄마!"(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어... OO아, 할 얘기가 있다"(머뭇하며 수화기 너머 한숨이 들려온다)

"어, 뭔데?"

"에혀... 엄마 요즘 너무 힘들다. 너 학교 이제 그만 다니면 안 되겠니?"

"....."(나는 목이 메어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학 2학년.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1학년 기숙사 생활을 하고 나왔지만 방을 따로 얻을 형편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학교가 있던 도시도 아니고 인근 도시의 외삼촌댁에서 통학을 하면서 어렵게 공부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저녁 엄마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사실 그 순간 학교를 그만 다니라는 엄마에 대한 원망보다는 딸에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 그리고 그런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나 스스로에 대한 좌절감이 가장 컸다. 나 말고 오빠와 남동생의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까지 동시에 감당해야 했었기에 엄마 입장에서는 나를 그만두게 하는 게 제일 쉽고 또 현실적인 결정이었다.


힘없이 엄마의 전화를 끊고 저녁이 차려진 밥상 앞에 엎드려 나는 한참을 울었다.  부엌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외숙모는 내가 진정이 되자 엄마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나를 다독여 주셨다.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냐고. 딸인 나는 죄가 없다고. 두 아들의 공부보다는 아무래도 덜 신경 쓸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결국 고민 끝에 나는 1년 휴학을 결정했다. 고향으로 내려가 1년을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면서 시간도 벌었다. 사실 학비를 벌었다기보단 시간을 벌었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쉬면서 좀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더 모았으며 복학 후 생활이 조금은 나았을 텐데) 고만고만한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데이트도 하며 나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렇게 고향에서 1년이란 시간을 보낸 후 복학을 했다. 매일 왕복 3시간을 꼬박 통학하는데 지쳐버린 나는 4학년이 되자마자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던 친구와 함께 살기로 한다. 말이 그렇지 그냥 친구 집에 돈 한 푼 내지 않고 얹혀 산 것이다. 대학 초반 이것저것 하느라 죄다 망쳐놓은 '학점관리'와 각종 자격증 준비에 마음이 급했던 나는 강의실과 도서관, 친구 집을 정신없이 오가고 있었다. 한편으론 하루하루 집주인 친구의 눈치만 보며 하루빨리 졸업이 다가오기만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친구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길. 순간 배가 너무 고팠던 나는 분식집에서 쫄면 하나를 포장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들고 바로 친구집으로 가지 않았다. 골목길 한켠 차가운 평상에 자리를 잡았다. 겨울이 다가오는 쌀쌀한 공기에 밖은 점점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이제 막 켜진 가로등 아래에서.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쫄면 한 그릇을 먹어치웠다. 시뻘건 고추장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나무젓가락과 빈 쫄면 그릇을 무심코 내려다보던 나는 갑자기 올라온 울컥함에 한참을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급하게 먹은 쫄면으로 혹시라도 체할까 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벌떡 일어나서몰래 먹은 저녁의 흔적들을 주섬주 하얀 봉지에 어두운 골목길 어딘가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렸다.


그렇게 1학년 기숙사 생활을 제외하고 대학 3년을 나는 친척집과 친구집 눈칫밥을 먹으며 힘들게 다녔다. 남자 형제들에 떠밀려 학업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20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의 터널을 나는 지나고 있었다. 사실 누가 봐도 찌질하고 많이 궁상스러운 내 모습이다. 그럼에도 이런 20대의 내 모습을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할 용기가 어떨 때는 더 많은 걸 나에게 가져다줄 수 있다는 걸 (지금이라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인걸까.


내가 딸이어서 남자 형제들에게 떠밀렸다고 말했지만. 사실 오빠와 남동생은 대학 내내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부모님의 재정적인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열심히 공부한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입학 때 딱 한번 장학금을 받은 게 다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심지어 남동생은 방학 때마다 새벽부터 밤까지 공장에서 박스 포장하는 아르바이트를 구해 생활비의 대부분을 벌어서 다녔다고 한다.


그에 비해 나는 어땠을까. 편한 아르바이트만 고집하며 학비를 벌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 바빴다. 휴학기간 빼고는 학기 중에는 아르바이트를 구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엄마는 당연한 결정을 한 것이었다. 장학금 꼬박꼬박 받아오는 자식 둘과 장학금은커녕 학기 중에 공부보다는 연애하기 바쁜 자식 중 누굴 선택해야 할까. 거기에 아들과 딸이라는 차별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늘 살면서 내 마음 속 어딘가 웅크리고 있던 '딸이어서 억울하다'는 마음이 더없이 부끄러워지는 부분이다. 가끔씩은 억울함보다는 '그럴듯한 핑계거리'로 내가 그걸 이용하지 않았나하는 생각 이제서야 든다. 그랬다.


한편. 초겨울 저녁 서늘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쫄면 한 그릇을 허겁지겁 먹어치우던 나는 결국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고 자신의 집 일부를 어 준 친구에게 쫄면 한 젓가락도 아까운 이기적인 친구였. 졸업 때까지 그 친구에게 진심 어린 고마움을 표현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나는 그 시간들을 그냥 그렇게 흘려 보냈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 친구가 누구 눈치 주고 그런 성격도 아니었다. 나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해 주고 도와준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런 친구의 약한 마음을 이용한 내가 아니었을까. 쫄면 한 그릇이라도 친구와 나눠먹을 수 있는 아량도 여유도 당시 내겐 없었기에.


없이 힘들기만 했던 20대가 훌쩍 지나 이제 나는 40대를 보내고 있다. 많이 어리숙하고 부족함 많은 '그냥 그런 애'라서. 그때 내가 상처 주고 미처 고맙다고 말하지 못한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이 분명 있다. 그래서 '나의 40대를 함께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나는 진심을 다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늦은 후회는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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