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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Jan 20. 2021

애두고 혼자 연수간 엄마

"애는 어쩌고?"

"오랜만이네? 어디 다녀왔다고 들었어."

"네, 잠깐 공부 좀 하고 왔어요."

"아니 그럼 본인이 공부하러 거야?"

(갑자기 따지듯 말투가 바뀐다)

"네..."(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진다)

"애는 어쩌고?"

"그게 말이죠..."(주저리주저리)


아이가 7살에서 8살이 되어갈 즈음 나는 3개월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직장에 복직을 하고 오랜만에 만난 동료와의 대화 중 그의 "애는 어쩌고?"라는 물음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게 말이다. 애는 어쩌고 나는 무려 3개월이나 외국으로 연수를 다녀올 수 있었을까. 심지어 아이의 입학식 3일 전에 부랴부랴 입국을 했다. 입학 날짜를 확인하고 미리 귀국일을 그리 맞춘 것이다. 최대한 체류기간을 길게 하고 싶어서다. 아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덜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또 누군가 따진다면 나도 할말이 없다. 그때는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전에 꼭 다녀와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3개월 만에 만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나는 입학식이 열리는 학교 강당에 들어섰다. 같은 반이 된 아이들과 옹기종기  맞추어 앉아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미안함에 나도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게 각인시킨 "너는 애엄마잖아"라는 역할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애를 떼어두고 연수를 다녀온 나의 이기심에 대한 죄책감이 그제서야 들었던 걸까.(외국에서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더니...)


공부하는 동아이를 따로 돌봐줄 분도 있었고 가족들도 걱정 말라며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내가 애엄마라는 사실과 '엄마가 애를  봐야지 어딜 가냐'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저리주저리 그들에게 진땀을 빼며 해명(?)하기 바빴다. 그다지 친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뭐하러 그리 절박하게 사람들을 이해시켜야만 했을까. 그 후로도 몇 년을 더 그 질문은 나를 쩔쩔매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이 없이 혼자 떠난 것에 대한 세상의 이해를 구한 것일까 아니면 나 스스로의 납득을 것이었을까.


그럼 그때 나는 가장 중요한 아이의 이해는 구했었나? 남들에게 보여지는 '따뜻하고 그럴듯한 엄마' 이미지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아이의 이해를 진심으로 구한 기억은 아무리 애를 써봐도 기억나지 않는다. 연수를 다녀와서 3개월 더 휴직을 내어 이제 막 낯선 학교에 입학한 아이를 챙겨주겠다는 약속도 18일 만에 급하게 복직을 하게 되면서 지키지 못했다. 그 후로 몇 년을 아이는 "3개월 더 쉬기로 했는데 왜 안했냐"며 날 많이도 원망했다.


사실 재작년에 6개월 동안의 오전 근무는 (많이 늦었지만) 아이와의 오래된 약속을 나름대로 지키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와 오후 시간을 오롯이 엄마와 함께 보낸 그 시간은 아이에게 또 어떻게 남겨졌을까. 이 질문에 대해 당장은 답을 얻을 수 없을 것 같다. 나중에 아이가 크면 '예전에 그랬던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겠니?' 정도는 물어볼수 있지 않을까.


내 선택에 대한 이해를 구할 대상이 조금 더 명확해져서일까. 요즈음 나는 더 이상 그때 그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변명이나 해명 따윈 하진 않는다. 그 3개월은 혼자라서 또 의미가  있었고 아이도 엄마 없는동안 성숙할 수 있는 나름 가치있는 시간이었다고 망설임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 아이와 잠들기전에 잠깐 나눈 대화다.

"엄마, 코로나 이거 끝나면 여행 가자. 해외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야?"

"뉴질랜드 남섬!"

"왜? 거기가 좋아? 엄마가 옛날에 혼자 가본 곳이지?"

"응, 자연이 너무 멋진 곳이야. 그곳에 갔을 때 OO 이를 꼭 다시 데려오겠다고 결심했었어."

"알았어 엄마, 끝나면 꼭 같이 가는 거야. 약속!"

"약속!"


시간이 흘러 이제 아이는 6학년이 되었다. 5년 전 '나홀로 어학연수'로 인해 주변에서 들었던 수많은 우려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그때의 일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할 정도로 편해졌다. 지난밤 내가 그리 단단히 약속을 했음에도 아이는 엄마와 다시 그곳을 갈 수 있으리라 믿지 않는 눈치다.  과연 그럴지는 또 두고봐야 하지 않을까.


아마 앞으로도 나는 끊임없이 한 아이의 엄마, 우리엄마딸, 직업인, 작가 등등 '다채로운 나'의 역할들 사이에서 갈등것이다. 그리고 순간 이런저런 선택이란 걸 할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이상하고 '세상' 이기적인 선택을 나는 또 하겠지.


다만. 예전과 지금이 다른 것이 있다면. 그건 '선택과 집중'이 아닐까. 내가 '아이엄마'로써 역할을 선택하 집중해야 할 대상(세상에 보여지는 내 모습이 아닌) 그런 나를 바라보는 아이에 대한 진심 어린 이해라는 . 그리고 '오늘의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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