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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Jan 03. 2021

시도때도없이 이쁘게 보이고 싶은 여자

"이쁘게 봐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OOO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이쁘게 봐주세요~!"

(허리가 꺾일 듯 인사를 하고 방긋 웃는)


8~9년 전쯤이었을까. 해외 출장 중 그날 일정이 모두 끝나고 편하게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아직 분위기 파악도 못하던 어리숙한 나에게 일어나서 자기소개를 해 보라는 어느 분의 지시가 떨어졌다. 뒷자리에서 밥을 먹다가 나는 벌떡 일어났다.


긴장한 발걸음으로 식당 앞자리 한편에 자리 잡고 목을 가다듬었다. 앞자리의 대부분이 나보다 나이나 지위가 높은 분들이었다. 그래서 더 많이 긴장했다. 머릿속은 이미 하얗다. 정체모를 '윙윙~' 소리만이 뇌를 채울 뿐.


잔뜩 뜸 들이다가 마침내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이쁘게 봐주세요!"였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앞자리에 앉은 몇몇 분들의 왠지 모를 '쎄'한 표정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뭐 그렇다. 예상치 못한 냉랭한 분위기에 애매한 웃음으로 급히 마무리하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잊었다. 아니 잊으려고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날의 창피함은 여전히 내 안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하다.


당시 나는 꿈에도 몰랐다. 그 인사말이 나란 사람을 어떻게 보이게 했는지 말이다. 그 후 가끔씩 그날의 소개 시간이 생각날 때마다 애꿎은 이불에다 발차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나는 그런 여자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 일상의 많은 행동과 말투에서 그런 것들이 갑자기 거짓말처럼 툭툭 튀어나온다.


오래전 창피했던 '그날의 소개 인사'를 떠올리게 해 준 이 오늘 있었다. 바로 영화 '킹콩'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으며 나는 무심히 TV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EBS 화면에서 나도 모르게 멈추었다. 영화 '킹콩'이 막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 영화의 제작연도가 마침 내가 태어난 해라서 더 끌렸기도 했다.


급히 먹던 점심을 치우고 소파에 자리를 잡고 언제쯤 킹콩이 등장할지 잔뜩 기대하며 화면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영화 캐릭터 하나가 내 눈에 계속 혔다. 난파선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아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한 구명보트에 둥둥 실려 홀연히 남자들만 타고 있는 대형 선박 앞에 나타난 여자.


드완(제시카 랭). 영화에서 드완은 영화 지망생으로 금발머리에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여성이다. 킹콩을 비롯한 영화 속 모든 남성들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하는 캐릭터다. 심지어 킹콩이 태어난 섬의 원주민 족장마저 그녀를 보자마자 원주민 여성 6명과 드완을 맞바꾸자고 제안할 정도다. 그렇게 킹콩이란 영화는 아름답고 치명적인 매력의 여성인 드완의 움직임을 따라 킹콩을 비롯한 모든 남성 캐릭터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놀라웠다. 영화 '킹콩'은 나름 내 기억에서 동물과 사람의 아름다운 로맨스 괴수영화? 정도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오늘 다시 본 '킹콩'은 정작 주인공 '킹콩'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화 내내 유일한 여성 캐릭터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과 눈물이 난무한다. 드완. '세상' 우유부단한  여성 캐릭터가 '킹콩'의 진짜 주인공이었다!


1976년. 당시 많은 여성들에게 당연하게 기대되고 요구되던 역할이 바로 영화 '킹콩' 속 드완이라는 여성이 아니었을까. 그 해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30년도 더 지나 어느 출장지 식사자리. 남자분들이 대부분인 사람들 앞에서 내가 나도 모르게 내뱉은 "이쁘게 봐주세요!"라는 인사말.


킹콩이 죽자 바로 다른 남자의 이름을 애타게 외치며 찾아 나서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나는 TV를 꺼버렸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 변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일상에서 일터에서 나의 태도에서 타인의 태도에서 종종 이상한 찜찜함을 느낄 때가 다. 그냥 애매함이라고 해두자. 뭐가 적당한 지 혼란스러운 그런 거 말이다.  


이 시대 진짜 여성의 모습은 도대체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40년도 더 된 괴수영화의 캐릭터 하나에 내가 너무 몰입한 건가. 살짝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사실 난 그녀의 모습이 그다지 낯설지 않다.


과거 어느 순간이든 현재의 모습이든 여전히 유효한 뿌리 깊은 내가 가진 '여성'이란 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들. 그것들에 휘둘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오롯이 나의 방식대로 인생을 꾸려 나갈 수 있을까.


앞으로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조금은 덜 휘둘리는 삶을 나에게 그리고 이 세상 절반인 여성들에게 선물하고 싶기에...




킹콩 여주인공으로 1976년 데뷔해 연기에 혹평을 받았던  '제시카 랭'이 지금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 토니상 등을 거머쥔 연기파 배우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위키피디아 자료가 유난히 반가운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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