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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Jan 10. 2021

운전 좀 시켜달라는 여자

"저도 운전 하는데요?"

일요일 아침. 고정 근무자끼리 순번으로 주말근무를 하는 사무실. 오늘은 나의 근무 차례다. 아침부터 뭔가 바쁘게 돌아간다. 이런저런 보고서 작성에다 같이 근무하는 팀장도 나도 정신이 없다.


바쁜 오전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부서의 또 다른 팀장이 사무실로 불쑥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급히 누굴 찾는 눈치다.

"OOO이 어디 갔어?"

"아, 오늘 근무 아니에요. 제가 오늘 근무입니다만..."

"그래요? 아, OOO이가 있어야 하는데..."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아니야"


의아스러웠다. 내가 못 미더운 건가. 왜 오늘 근무도 아닌 남자 직원을 유난히 찾는 거지?

내가 계속 궁금한 얼굴을 하자,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 팀장이 말했다.

"빵을 몇 군데다 전달해야 하는데 운전할 사람이 없네.."

(내가 웃으며)"팀장님, 저도 운전하는데요?"

(뭔가 못 미더운 표정으로)"그래?"

"네, 안되면 제차로 그냥 가시죠?"

"그럴까?"(여전히 못 믿겠다는 얼굴이다)


듣다 못한 옆자리 또 다른 남자 직원이 대뜸 나선다.

"팀장님, 그냥 제가 갈게요."

(내가 더 당황해서)"아니, 제가 간다니까요."

"그냥 제가 갈게요. 사무실에서 저 대신 서류 작업을 해주시면 되죠."

결국 그 남직원이 팀장을 따라 운전대를 잡으러 나섰고, 나는 사무실에 남아 이런저런 서류 작업을 했다.


나의 뭐가 그리 못 미더웠던 걸까. 나의 운전 경력은 무려 17년이다. 운전면허를 따고 거의 매일 운전대를 잡고 있다. '네비언니'만 있으면 사실 전국 어디든 갈 수 있고, 또 갔었다. 도대체 나에게 운전대를 못 맡길 이유가 무엇일까. 그날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면서도 계속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내가 여자라서? 혹시라도 헤맬까 봐? 아님 여자한테 운전대 맡기고 뒷자리 앉아있으면 불편해서?'

오만가지 질문과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결론은 계속 내가 '여자라서'로 돌아왔다. 이전에도 이런 경험이 한두 번 더 있었지만 그때는 내심 그냥 잘됐지 뭐 싶었다. 씁쓸하게 끌려나가는 남직원들의 뒷모습을 힐끗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직장생활이란 걸 한지 이제 20년이 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내 눈에 대부분 관용차의 운전대는 여전히 남자 직원들의 전용 공간이다. 도통 모르겠다. (이놈의 조직은 운전에서 남자직원에 대한 대단한 믿음이 있는 건가)


사실 20동안 남자보다 여성 운전자들이 훨씬 더 많이 늘어났음에도 왜 관용차의 운전대는 대부분 남자들의 몫이 되는 걸까. 사무실에 운전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경험이 너무 없는 걸까. 우리 조직에도 운전직렬이 별도로 있지만, 전부 남자들이다. 왜 여성 운전직렬은 없는 거지? 도대체 왜?


'관용차 운전대'처럼 여전히 강력한 일터에서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또 있을까. 이것부터 바뀐다면 짐 옮기는 사소한 것부터 차량 운전까지 힘쓰는 일에 당연하게 끌려 나가는 소수의 남자 직원들에 대한 역차별이 조금은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여자들도 힘을 써야 할 때는 쓴다. 혼자 힘들면 같이 한다. 내 바람은 뭐든 남녀 구분 없이 그냥 있는 대로 맡기면 어떨까 하는 거다.


사실 지금까지 이런 남자 직원들의 희생 아닌 희생을 발판 삼아 나는 조금은 편하게 직장생활을 해왔다고 감히 고백한다. 왜 그냥 보고만 있었냐고? 나서지 그랬냐고?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나에 대한 자신감 말이다. 나도 모르게 몸을 사렸다. 그건 그냥 남자들 몫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자라면서 보고 배운게 그런거라고. '운전은 남자'라는 생각이 뿌리깊게 박혀버린 탓이라고 얄팍한 변명을 나 스스로에게 일삼았다. 


하지만, 지난 일요일의 그 상황처럼 이제 나는 그냥 가만히 있지 않기로 했다. 왜 나에게 운전을 맡기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도 운전할 줄 안다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이런 노력에도 결국 운전대는 남자 직원에게 돌아갔지만, 결코 나는 이 노력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여기선 멈춘다면 또 얼마나 많은 남직원들이 관용차 운전대 앞에 앉게 될 것이며, 또 얼마나 많은 여직원들이 빛나는 운전실력을 뽐낼 기회를 잃어버릴 것인가. 너무 슬프지 않은가.


나에게 관용차 운전대를 잡게 해 달라. 나도 운전이란 걸 하는 사람이다. 언제쯤 내게도 가만히 있어도 운전대를 덥석 맡기는 그 누군가가 '짜잔'하고 나타날까. 그 순간을 위해 오늘도 나는 내 차의 운전대를 잡는다. 누구나 편견 없이 운전대(특히, 관용차!)를 잡을 그날을 위해.   


#관용차 #여성운전자 #성역할 #역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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