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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Mar 06. 2021

우울한 방구석 산책자

코타키나발루 그리고 방구석

코타키나발루 그리고 방구석

바다가 유난히 아름다운 태평양의 코타키나발루로 몇 년 전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두 번째 날 아침. 걷기 중독자인 나는 혼자 벌떡 일어나 숙소 앞 해변으로 달려나갔다. 청량한 파도소리와 향긋한 바다 냄새에 취해 달리기도 하고 느기적느기적 걷기도 하던 나는 우연히 앞서가는 동행을 발견했다.


모래 위 두 개의 선명한 발자국을 고스란히 남기면서 바다를 향해 천천히 조금씩 앞을 내딛는 작은 조개였다. 꽤 일찍부터 부지런하게 길을 나선 모양이다. 바쁜 마음이 느껴지는게 나의 등장에도 신경도 안 쓰고 느릿느릿 그냥 앞만 보고 간다.


아직 갈길이 엄청 남아 보였지만 나는 왠지 이 놈이 저 푸른 바다까지 언젠가는 무사히 도착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동행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허락을 받을 길이 없어) 무작정 내 카메라에 쓰윽 담아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그 후로 일상이 조금 지칠 때마다 나는 코타키나발루 해변을 같이(?) 산책한 유난히 조그맣고 하얀 친구의 사진을 꺼내보곤 했다. 바다를 향해 조금씩 걸음을 나아가는 모습이 왠지 ''하면서도 위안이 되어서다.


그리고 요즘 다시 이 사진을 찾아볼 일이 내게 또 생겼다.


몇 년 동안 나의 토요일 아침은 늘 산책이나 등산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옛날의 일처럼 희미하게 느껴진다. 두 달이 채 안되었다. 편하게 산책하듯 '걷는 일'을 못한 것이. 더군다나 걷기 집착녀인 나에겐 무척 힘든 일이다.


마음은 우울하고 얼마 전 깁스를 풀어서 파스를 덕지덕지 붙인 오른쪽 다리는 더 우울해 보인다.


어제는 성급하게 그나마 하나만 짚던 목발을 대기실에 (버려)두고 진료실에 들어갔다가 간호사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당분간은' 목발을 짚고 걸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허락 없이 그냥 두발로 걸어 들어간 게 문제였다.


"제가 말한 '당분간'은 생각보다 깁니다"

종일 사무실에 앉아있어서 부종으로 퉁퉁부은 오른발의 통증도 잊은 채. 나는 의사 선생님의 그 한마디에 목발을 꽤 오래 짚고 다녀야 할 걱정에 다시금 침울해졌다.

 

현. 실. 부. 정.


지금 딱 그 심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통해서라도 '나에게' 못을 박아야 한다. 쓸데없는 망상을 방지해야 한다. 더 나은 방법을 찾는데 '현실인정'은 필수가 아닌가.


내가 나에게 명령한다!

<방구석 산책 명령서>

3개월만 좀 참아!
그동안 집안을 조금씩 산책해. 한걸음 한걸음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먼지 쌓이고 너의 애정어린 손길이 필요한 것이 없나 살펴도 봐.

그리고 너의 산책길을 졸졸 따라다니는 '냥이'(반려묘)랑 눈 맞추면서 놀아도 주고 말이야.

그렇게 아침마다 방구석에서 또 다른 산책의 길을 만들라고! 바깥에서 산책이 전부가 아니거든.'

발산자;나  
수신자;나

오늘도 나는 방구석을 걷고 또 걸었다. 비록 보기에는 느리고 짠해 보일지라도.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누군가 불쑥 나타나 동행해 줄지 또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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