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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Feb 15. 2021

조금 애매한 여자

'그의 애매함이 심하게 질투난다'

'그의 애매함이 심하게 질투난다'

저는 애매한 사람이다. 충분히 예술적이지 않고 대중적이지도 않고. 제가 살아남는 것, 환대를 받는 게 어리둥절했다.
- 싱어게인, 이승윤 -


며칠 전 저녁을 먹고 거실 소파에 앉아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가 '싱어게인'이란 방송을 보게 되었다.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었고 참가자 중 한 명인 인디밴드 가수 이승윤이 한 말이 "저는 애매한 사람이다"였다. 그리고 그는 '애매함'으로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심사위원들보다 시청자들이 더 그의 애매함에 열광했던 득표 결과도 내게 무척 흥미로웠다. 남다른 음악 스타일보다 나는 그의 '애매한 사람'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처럼 얘기하는 사람을 주위에서 많이 못 본 탓도 있지만, 나도 예전에 비슷한 생각을 종종 했기 때문이다. 경계에 있는 사람. 이쪽도 저쪽도 못 끼고 어색하고 애매한 그런 사람. 그래서 나도 (자칭) 애매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었고, 어떤 심정으로 무명의 인디밴드 가수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어렴풋이나마 느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애매함을 무척이나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해내는 그가 반갑기도 하동시에 '심하게 질투가 났다'. '나는 왜 저렇게 살지 못할까' 하면서.


세상에는 두 개의 '성'이 있다( 배운다)


남성과 여성. 나란 사람은 염색체 'XX' 여성이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에 '으앙!' 하고 튀어나왔을 때부터 '여성' 또는 '여자'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쭉 내 이마에 떡하니 붙이고 살아왔다. 그러다 어제 나는 조금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초부터 아담과 이브, 즉 '남과 여'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알았던 인류에게 또 다른 '성'이 있다는 것이다.


<질의응답>이란 책이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 출신의 니나 브로크만과 엘렌 스퇴켄 달이란 두 여성이 2017년 펴낸 여성의 신체에 대해 꽤? 솔직하고 사실적인 내용을 담은 '의학서적'이다. 여기에 '간성(intersex)'이 나온다. 책에 따르면 '간성'은 말 그대로 <두 성별 사이>라는 뜻으로 유전적 성별(XX와 XY)과 신체적 특성이 일치하지 않아 <애매한>(실제 책에서도 '애매한' 이란 용어를 쓴다) 아기들에게 의사들이 내리는 의학적 진단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두 개의 '성'에만 갇혀 살아왔던 내게 또 다른 '성'의 존재는 과연 어떤 의미인 걸까.


'트랜스젠더(trans+zender)', 즉 '성을 바꾸는 사람'은 이제 사람들에게 꽤 익숙해진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애매한' 성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니. 나는 지금까지 '남과 여'를 구분하는 기준에 유전적 성별 외에 다른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책 <질의응답>에는 성별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세 가지를 언급한다. 유전적 성별, 신체적 성별 그리고 심리적 성별. 정자와 난자가 성공적으로 만난 수정란이 엄마 자궁에서 적당히 세상에 나올 수 있을 정도로 키워지는 그 시간 동안. 생각보다 많은 요인들(염색체와 호르몬 등등)이 나의 성별을 결정한단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 기준이 (운 좋게) 모두 딱 맞아떨어지고 (애매한 구석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위 세 가지 기준에서 한 두 개가 처음부터. 아니면 중간에 또는 나중에라도. 조금 어긋날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어긋나는 게 어찌 보면 더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어차피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인 인류가 이렇게 지구를 시커멓게 뒤덮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런 어긋남(돌연변이)이 오랜 시간 쌓이고 쌓인 결과 아닌가.(다윈은 위대하다!) 그래서 '간성'은 어찌 보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내게는 낯설기만 하다.


"넌 남자애가 뭘 그렇게 울어? 남자는 우는 게 아니야"


어릴 때부터 아들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떼를 쓸 때 자주 울었다. 그때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넌 남자애가 뭘 그렇게 울어? 남자는 우는 게 아니야. 그만 뚝!" 나도 모르게 나는 아이에게 '내색하지 않고 강해 보여야 하는 남자'에 대한 역할을 심어주고 있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여중과 여고'를 나온 나. "여자는 이래야지, 남자는 이래야 되고 그래서 어쩌고저쩌고". 가족, 주위 친적, 동네 어르신 등등 내가 크면서 (그리고 이미 크고 나서도) 수없이 듣고 또 되새김질하던 말이다. 나이가 들어 내가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 똑같이 아이이게 '남자는 이래야지' 그러고 있다. 또 애매한 기분이다.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아이를 위해 어떻게 말하는 것이 맞는 걸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


나는 사회적 동물이란 말이 타고난 '본성'과 '사회성'을 동시에 가졌다는 말로 이해된다. 다시 두 개의 '성'이다. 아이가 타고난 기질과 타인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사회성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이게 사실 선택의 문제인지도 애매하다) 뭐 가장 쉬운 방법은 이미 많은 어른들이 나에게 알려 준 것이다. '남자는 강해야 하고 여자를 보호해야 하니까 울면 안 돼.'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부르는 틀에 맞추면서 '적당하게' 잘 사는 방법을 아이에게 알려주면 되는 거라고. 그게 바로 힘들지 않게 사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그럼 아이가 타고난 '본성'은 어찌해야 할까. 원래 마음이 여리고 눈물이 많은 아이라면. 눈물이 아이에게 약함이나 창피함보다는 '해소'와 '표현'이라면. 내가 그 '울음'을 뚝 그치게 하는 게 과연 맞는 결정일까.     


'이놈의' (이분법적) 세상은


그렇게 '남성과 여성', '본성과 사회성' 등으로 적당히 이해하기 쉬운 모습으로 나를 쉽게 길들여 온 게 아닐까 문득 의문이 든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간성'이 있듯, 본성과 사회성 사이에도 뭔가 애매한 것이 있어야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각성'? 같은 뭐 그런...


앞으로 내가 풀어야 할 숙제가 생긴 것 같은 애매함의 순간. 질투가 나지만  그래도 '애매한 그'의 앞날이 왠지 궁금하다.


애매한 경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대변할 수 있다.
- 싱어게인, 이승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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