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과 레깅스

영지의고민상담실 16

by 영지

"너 말투가 왜 그렇게 일반인 같아?"

"하고 다니는 모습은 절대 공무원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말이지?

도대체 공무원 백과사전이라도 어딘가 편찬되어 있는 것일까. 왜 이리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뭘 입고 다니든지 '공무원이, 공무원은....' 이런 꼬리표가 붙어 다니지?


그 옛날이다!

공직 초반에 귀에 피가 날정도는 아니었지만 잊을만하면 듣던 말이 '공무원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조금은 고리타분한 스타일에 나서지도 튀지도 않는 뭐 그런 사람이 공무원스러운 걸까. 벌써 시간이 꽤 흘렀기에 지금과 비교하면 그때와 또 많이 달라지긴 했다.


요즈음.

근무기간 2~3년 차의 어린 후배 공무원들을 보면서 과거의 나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전부는 아니지만 몇몇 직원들이 풍기는 느낌은 뭔가 자신감도 있고 당당하다. 적어도 과거의 나보다는 더 그래 보인다. 그렇다고 '공무원스러운' 문화가 많이 사라진건 또 아니다. 나처럼 그 문화 속에서 십 년 이상 버텨온 사람들이 여전히 조직에 많기에 그렇다.


그래서 여전히 공직은.

옷이든 말투든 글씨체든 문구든.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일단 거부감부터 보인다. 그리고 그냥 위에서 시키는 것만 하라고. 안전하게 하는게 너를 위해 나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최선이라고. 다양한 방식으로 공직 초년생들을 (은근하게) 압박한다. 그나마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처럼 앞에다 대놓고 하진 못한다.


공무원스러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어디서?


'어, 레깅스다!'.

몇년 전 어느 체육 행사날이었다. 직원 한 명이 반팔티셔츠에 레깅스만 입고 왔다. 긴 생머리에 검은색의 딱 붙는 레깅스를 입고 운동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응원도 하고 함성도 지르며 동료들과 분위기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이런 공식행사에 왜 저런 걸 입고 왔지', '집에서 입는 옷을... 민망하게시리' 라며. 당시 조금은 이상한 시선으로 그 직원을 바라봤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그 후로도 몇 번인가 그 직원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날의 레깅스를 떠올리며 조금은 '튀는' 사람이라고 나름의 선입견을 가졌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그만큼의 용기도 없으면서 옷이든 뭐든 보수적인 조직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그 직원을 질투한 것이 아닐까. '너무 과하다, 튄다'라는 기준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는 그냥 옷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뿐인데. 당시 나는 있는 그대로 인정은커녕 속으로 은근 그걸 폄하하기 바빴다. 그러면서 과연 내가 '공무원스러움'을 탓할 자격이 있을까.


20년이 조금 넘는

직장경험은 그렇게 내게 이런저런 듣기에 그럴듯한 이유와 핑곗거리도 함께 선물(?)했다. 전혀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낯선 조직에 이제 막 들어온 사람들에게 그 선물은 때때로 날 선 무기로 바뀐다. '여기선 이래야 한다 저기선 저래야 한다'. 은근한 시선과 말투 그리고 태도로. 아직은 천진난만한 그이들 앞에서 내가 가진 그것을 마구마구 휘둘렀던 건 아닐까. 아니 지금도 무의식으로 휘두르고 있는건 아닐까.


오늘 아침.

여느때처럼 나는 검은색 레깅스를 입고 근처 공원으로 운동을 나갔다. 작년부터 운동 때마다 특유의 편안함에 반해서 자주 입기 시작한 레깅스. 하지만 레깅스를 입을 때마다 매번 고민이다. '위에 반바지를 입을까 말까'. '너무 민망한 패션이 아닐까'. '마흔이 넘은 나이에 조신하게 입어야지'하는 엄마의 잔소리도 떠올려본다.


결국

같은 검은색의 두툼한 면 반바지를 서랍 맨 아래칸을 뒤져서 찾아냈다. 그리고 레깅스 입은 두 다리를 허겁지겁 반바지 속에 쑤셔 넣었다. 낡아서 삐그덕거리는 장롱문에 붙은 길쭉한 거울을 보며 '애써'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본다.


레깅스 위 반바지처럼.

오늘도 나는 'OO스러움'에 두발을 스스로 가둬놓은 것인가. 걷는 내내 껴입은 반바지가 자꾸 불편하더니. '공무원스러움'은 여전히 '내 안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영지의고민상담실, 공무원이 꿈이 될수는 없나요?>

2021.9.25.(토) 11:00, 첫 온라인 강연(재능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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