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과 협업

영지의 고민상담실 24

by 영지

"요즘 많이 바쁘실 텐데, 죄송한 마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어 달 전 회의에서 내가 뱉은 말이다. 진심으로 미안했고 또 진심으로 부탁하고 있었다. 회의에 초대받은 입장이기에 내가 발언할 기회를 간절하게 기다리며 준비한 첫 번째 말이었다. 수직적 관계에 기반하는 지시와 수행이 아닌 수평적 관계인 협업을 위해 실무자인 나는 진심으로 그 말을 전달하는 것이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생각했다.


공무원과 협업.

두 단어를 같이 놓고 보니. 꽤나 어색해 보이는 조합 같다. 공무원이란 직업과 공무원의 일에 협업이 과연 어울리는 것인지 사실 생각할 기회가 거의 없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이 말은 내게 꼭 필요한 고민이라는 뜻이기도 하지 않을까.


요즘 내가 부서 간 협조가 무척이나 중요한 책발간 업무를 맡아서 어느 때보다 많이 '협업'에 대해서 고민이 많아진 탓이다. 수십 개의 부서들을 대상으로 자료 작성 방법을 설명하고, 그걸 취합하는 일을 맡은 직원들에게 또 한 번 더 설명을 한다. 거기에 외부 전문가인 작가와 디자이너까지 추가된다. 그렇게 2~3주 짧은 기간 서너 번의 회의를 통해 나는 실무담당자로써 비슷한 내용의 말을 계속 반복한다.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제대로 전달이 되고 있을까 사실 한편으론 의구심이 생겨났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싶어서 거의 일방적인 독백 한 사발을 또 쏟아내고 만다. 찜찜한 느낌이 남아도 듣는 사람들의 질문이 없으면 더는 말을 이어갈 명분이 없다. 그즈음 나는 입을 다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회의를 통해 전달한 작업의 결과물이 하나씩 도착한다. 완성도면에서 꽤 큰 편차를 가진 문서들을 드라이브 문서 폴더에 하나씩 저장했다. 어떤 문서는 손을 델 필요 없이 완벽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난감한 자료도 있다. 아니 비율적으론 조금 더 많다.


나는 회의에서 분명 '아'라고 말했는데 어떤 이는 '아'라고 들었지만 동시에 다른 이는 '어'라고 이해했고 또 다른 이는 아예 듣지 못했다고 한다.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러다가 미안한 마음을 비치기도 한다. 본래 업무 외에 이걸 또 하려니 힘들다고 한다. 나도 덩달아 미안해진다. 하지만 백 프로 미안함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이제 막 시작하는 일에 약해진 마음보다는 냉정함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 앞섰기 때문이다.


몇 주 전 이 글을 써두고 저장만 해놓은걸 오늘에서야 발견했다. 한동안 내 고민거리에 '협업'이 있었구나 어렴풋이 기억이 날정도로 나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글을 다시 열고 냅다 앉은걸 보면 딱 두 달 걸린 책 발간 작업이 어찌 됐든 (지난주로) 끝났기에 내게도 마음의 여유란 게 생겼나 보다.


막상 일을 마무리하고 당시 고민을 천천히 읽어보니 어쩌면 이젠 거의 습관이 되어버린 '과몰입'의 결과물이 바로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과몰입이든 뭐든 나름 고민의 산물이었던 '냉정함'은 그럭저럭 잘 유지했던 것 같다. 공무원들과 외부 전문가들과의 협업에서 갈등의 매 순간마다 나는 '내려놓기와 냉정함'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때론 욕도 먹고 원망도 듣고 애타는 부탁도 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일은 일대로 산으로 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협업.

이번 책 발간 업무에서 내가 얻은 경험이 있다면. 공무원의 일이라고 해서 협업에 특별한 기술이나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과 다양한 가치 기준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가 늘 핵심이다. 그냥 '다름'을 인정하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내려놓기와 냉정한 사고'를 자유자재로 할 줄 아는 유연성이 늘 필요하다는 것 정도다.


그리고 일 앞에서 내가 나의 감정을 살피는 태도를 다시금 생각했다. 과연 이것이 일의 진행에 도움이 될까? 업무 담당자는 거의 매번 부탁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는데. 남들이 알아서 내 사정을 알아보고 자기 일처럼 챙겨주면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바람이다. 그렇다.


내 앞의 현실은 꽤나 냉정하다. 이번에 뼈저리게 느낀 것도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입장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공무원들은 주어진 업무분장에 따라 법적 책임도 고스란히 져야 하기에 더더욱 협업을 끌어내기가 어려운 직업이다. 다른 직원의 일은 그다음이 되어야 한다. 사실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협업은 듣기에는 딱 좋은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파란 하늘에 맥락 없이 '둥둥 떠다니는' 뜬구름과 같다. 재미있는 건 역설적으로 이런 현실의 장애물을 힘없이 인정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협업의 돌파구가 열리기도 한다는 것이다.(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많이 힘드네. 니가 좀 도와주라."(한숨)

"...", "그래...알았어. 자료 보내줘봐. 최대한 해서 보낼게."

"어, 그래? 너무 고맙다!"


한 달 전쯤. 같은 사무실 동기에게 책 발간 자료를 취합하고 정리하는데 직원들의 지원이 꼭 필요한데 너무 힘들다고 무작정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때는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동기에게 냅다 던진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 동기는 내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단순한 동지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책 발간 일을 꽤나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고 그것은 나머지 직원들의 협력을 얻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부탁이든 자존심이든 사람들에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나의 태도가 조금은 자신 있고 분명하게 바뀌었다. 그랬다.


일이 끝나고 이제 다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지금. 그렇게 협업의 모습은 (사고처럼 나타났다가) 금세 또 없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협업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짧은 기록으로 남기는 중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난 두어 달은 내게 그냥 평범한 업무를 한 시간으로만 남을 테니까.


10분 남짓. 아주 짧았지만 진심을 다해 동기에게 도움을 요청한 그때가 어쩌면 두 달간 진행된 협업의 '결정적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고맙다, OO아!'























keyword
이전 05화공무원과 레깅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