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폭설이 쏟아진 다음날 아침.
거실 창문을 통해 내려다본 바깥세상은 온통 하얗다. 아파트 단지 빽빽한 건물들 사이. 하얀 눈밭에서 두 아이와 아빠는 눈사람 만들기에 한창이다.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는 정신을 차렸다.
'흠.. 화이트 설날?'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건지.'
'별다른 것 없는 명절이구만'
조금은 삐뚤어진 마음이 그새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오늘 출근을 한다는 것 정도다. 점심쯤 집을 나섰다. 그 새하얗던 눈이 이제는 많이 녹아 지저분한 얼룩을 도로 곳곳에 만들고 있었다. 다들 저마다의 고향으로 여행지로 흩어진 도심 한복판의 도로는 꽤 한산하다.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시청 건물. 웬일로 지하주차장 차단기가 올려져 있다. '무슨 일이 있나' 오늘 정기권 차가 아닌 다른 차를 가져왔기에 어디에 주차를 해야 하나 고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차단기가 올려진걸 보니 외부 차량이 긴급하게 시청에 들어와야 한다는 의미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지하 1층에 주차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복도에 들어서자 지상 1층으로 연결되는 로비와 계단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황토색 수백 개의 봉투가 널찍한 지하층 복도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저마다 흰 종이 한장씩을 들고 주소를 확인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거의 1년 이상을 이곳 지하에서 근무하고 있는 내게도 휴일, 그것도 명절날에 이런 북적거림은 많이 낯선 것이었다.
연휴 직전부터 쏟아진 확진자 수. 그 수만큼의 봉투들이 도시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있는 '그 사람들'에게 가기 위해 시청 지하 복도에서 나란히 도열하고 있다. 그것들을 싣고 도심 곳곳으로 배달할 이들은 어찌하면 시간 내에 제대로 전달할지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 혹시라도 그들에게 방해가 될까 나는 그 옆을 조심스럽게 지나쳐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열 평 남짓 조그만 사무실. 생기 없이 하얗게 내리비추는 LED 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천장의 등 개수만큼 오늘 6~7명의 직원이 조용히 정적 속에 앉아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가 먼저 어색한 새해인사로 적막을 깼다. 그제야 수줍은 미소와 함께 몇몇이 나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넨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 사무실은 '과도한 기쁨이나 반가움'이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24시간 혹시라도 있을 비상사태를 대비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 직원 누구라도 여기에서의 근무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늘 조금은 불편하게 인사를 나누게 된다. 어색하지 않은 인사가 오히려 더 이상한 곳이랄까. 너무 오랫동안 '비상상황'에서 일하게 되면 비정상이 정상인것처럼 느껴지듯 나조차도 이런 어색함이 편해진것 같아 씁쓸하다.
특히. 오늘은 설날이어서 더욱 그랬다. 밤샘근무를 하는 직원이 건너편에 앉아 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어쩌다 오늘 근무를?' 하는 눈빛을 보내자 '어쩔 수 없지요'하는 눈빛으로 답을 했다. 그렇게 아주 잠시 조금은 측은하게 같은 워킹맘 처지인 서로를 바라보았다. 예의 그 '어색함'이 다시금 책상 위 큼지막한 검정색 모니터들 사이 빈 공간을 비집고 잠시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오늘은 그저께 일요일 근무에 이어 이번 연휴 두 번째 근무다. 그날도 쏟아지는 확진자수와 그에따라 물밀듯이 들어오는 자료들을 가지고 하루 종일 끙끙댔다. 결국 미처 완료하지 못한 통계 파일을 밤샘 근무자에게 맡기고 퇴근을 해야 했다
오늘은 그때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다. 보건소에서 자료가 시간 내 들어올 희망이 안보였기 때문이다. 며칠간 많은 수의 확진자가 계속되면서 어느 정도 예상된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사무실을 흐르고 있었다. 나 또한 휴일 임무를 잊지 않았다. 나를 포함해서 4명의 직원이 함께 작업하는 자료에 내가 할 수 있는 분량을 채우고 또 채웠다. 혹시나 입력이 겹치지 않을까 수시로 작업을 물어보고 그렇게 '화이트설날' 지하공간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밤 10시. 낮 근무자들이 한 명씩 소리 없이 퇴근하고 이제 밤샘 근무자 두명과 나만 덩그러니 사무실에 남았다. 20~30대의 젊은 보건직 직원들 두 명이 오늘 근무자들이다. 그중 한 명의 뒷모습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은색 끈으로 긴 생머리를 아무렇게나 질끈 묶었다. '언제 미용실을 가봤을까. 한창 데이트하고 쇼핑 다닐 나이인데...' 예전 철없이 시간만 보내던 나의 20~30대가 떠올랐기에 더욱 무거워진 마음으로 가방을 챙겼다.
"(자료) 많이 못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진짜 많이 해주셨는데요."(웃음)
이후 들어오는 자료들을 밤새 작업해서 다음날 새벽에 나오는 근무자들에게 잘 전달하는 것이 이들이 내일 하는 일이다. 이곳의 24시간은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료들을 시간대별 근무자들이 하나씩 이어붙이면서 완성된다. 임무를 끝낸 직원들은 다음 근무자들로 채워지고 그리고 잊혀진다.
퇴근을 알리려 옆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나를 배려해서일까. 따뜻한 미소에 고마움을 담아 표현해준 두명의 직원들.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는 사무실을 나설수 있었다. 그렇게 주차장 입구를 향하던 나는 텅 빈 복도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는 카트 두대를 발견했다. 몇 시간 전 이곳을 가득 채웠던 수백 개의 봉투들이 저 카트 두대에 실려 여러 대의 차량에 옮겨졌겠지. 그리고 지금쯤 누군가의 집 문 앞으로 하나둘씩 그 봉투가 도착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임무를 다했으니 지금은 그냥 저렇게 던져놨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저 카트 두대가 아까 뭘 했는지 금방 알아보았다. 그리고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고생했어.' 누구에게 향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 내 마음속에 떠오른 말이다.
사실 특별한 것 없는 명절 근무라며 투덜거리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시작했다. 하지만 함께 일한 두 직원의 '새하얀 미소' 덕분에 퇴근길 진짜 '화이트 설날'을 마주한 듯 조금은 특별한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