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공무원과 점심시간

영지의고민상담실 25

by 영지

꽤 오래전 동주민센터에서 근무하던 때다. 민원업무를 다른 직원과 단둘이서 맡게 되었고, 먼저 근무하고 있던 그에게 새로 전보 발령된 내가 물었다. 혹시 한 명이 휴가라도 가면 그날 점심은 어떻게 먹었냐고.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한다.


"알아서 먹었죠..."


이게 무슨 말이지? 잠시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당시 우리 말고도 다른 직원들이 몇명 더 근무하고 있던 사무실이다. 점심시간에도 민원업무는 계속해야만 했기에 둘이서 맞교대가 안되면 혼자 남은 민원 담당자는 배달음식을 시켜놓고 업무를 계속 봤던 것이다. 아니면 아예 점심을 포기하든지.


말 그대로 '알아서 먹는' 점심이다.


이전에 근무했던 주민센터에서는 민원대 뒤에서 일반 업무를 하는 직원들이 교대해주어서 그나마 밥이라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새 근무지의 전혀 다른 분위기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옆자리 직원이 쉬는 날이 되었고 나는 진짜로 점심시간 테이블 하나 덩그러니 놓인 좁은 휴게실에 분식을 시켜놓고 민원인이 오면 나가서 일을 보게 되었다. 점심시간 내내 휴게실과 민원대를 그렇게 오가다가 밥은 다 식었고 나의 배고픔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날 점심의 반도 못 먹고 남겼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땐 그게 최선일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궁상을 떨었나 싶다. 점심시간은 법으로도 보장받는 당연한 권리인데. 교대해달라고 어디든 부탁이라도 좀 해볼걸. 다 식어버린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다 집어넣으며 일을 '뭐가 그리 바뀐다고'. 그랬다.


이미 옆자리 동료는 수개월 동안 그렇게 점심을 해결하고 있었고. 나중에 합류한 나조차도 그곳에서는 그게 맞는 거구나 생각했다. 큰 문제의식 없이 그냥 상황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시 혼자서 점심과 민원을 한꺼번에 해결하면서 느꼈었던 깊은 서러움은 내 마음 한구석에 덩어리째 남아있다.


10년도 넘은 과거의 일이다. 설마 지금도 그런 분위기의 근무지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벌써 일부 행정복지센터에서는 점심시간 민원업무 휴무를 시범적으로 실시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공식적으로' 동주민센터 직원들의 점심시간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는 것 같아서 반갑다. (설마 지금도 누군가 점심시간 뒷자리가 텅 빈 사무실에서 포장음식을 우물거리며 민원을 보고 있지는 않겠지. 진심으로 이제는 안 그랬으면 한다)


자, 그러면 구청과 시청까지 모든 공무원들의 점심시간이 오롯이 그들만의 자유시간이 되었을까. 여전히 나의 답은 '글쎄'다.


희한하게도 민원대를 벗어나 일반 업무로 가면 예전의 서러웠던 '알아서 먹는' 점심이 다시금 그리워진다. 지역 단체원들과의 식사, 부서 내 식사 순번 등등. 이런 점심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원대를 탈출한 직원이 맘껏 누릴 수 있는 점심은 주중에 며칠 되지 않는다. 그나마 미리 약속을 잡아놓고도 높으신 분들(?)과의 식사가 무례하게 끼어들지 않을까 계속 불안하다. 그렇다


조직에서 '화합과 일심동체'. ', 많이, 아주' 중요하다고 민간기업과 공공기관 둘다를 경험하면서 나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또 들었다. 이제는 그게 무슨 신념처럼 느껴질 정도니까. 개인의 희생을 어쩌면 당연하게 여기는. 집단주의적 문화가 여전한 우리 사회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MZ세대가 이런 조직문화에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드러내 놓고 표현하는 것도 꺼리는(물론 그 반대도 있다) 그들이 쓸수 있는 카드는 과연 몇장이나 될까.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는 8~9급 주무관들의 '의원면직' 인사발령을 내가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도 있다. 얼마 전 만난 어느 팀장님의 작은 결심 때문이다. 팀원들과는 일주일에 한 번만 점심을 먹고 나머지 요일은 각자 편하게 먹는 걸로 최근에 마음을 먹었단다. 얼마나 잘 실천할 수 있을지는 또 두고 봐야겠지만 그 마음먹음 자체가 나에게는 의미가 컸다. '이런 분들이 점점 많아지면 좋으련만...'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다. 며칠 전 어느 후배와의 메신저 대화가 문득 떠오른다.

후배: 어머, 너무 죄송해요.

나: 무슨 일 있어요?

후배: 오늘 약속했던 점심을 같이 못 먹겠어요. 'ㅇㅇ님 모시는 날'이 오늘인걸 깜빡했지 뭐예요.ㅠㅠ

나: 아... 괜찮아요. 다른 날로 잡아요


오래된 조직문화? 관습? 원래 그랬으니까? 뭐 좋다. 그렇다고 직원들이 마음 편하게 점심시간을 가질 자유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자유는 PC 자판 위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들을 통해 감정섞인 텍스트로 변환되어 같은 팀과 아래층 부서, 이웃 도시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온(On) 세상을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치보지 않고 "저, 약속 있어요!"라고 툭 던질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필요한 곳이 공직 어딘가 여전히 존재한다.


특유의 딱딱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관공서라는 곳. 단 한 시간만이라도 완전히 거길 벗어나서. 평소 좋아하는 음식을 즐기면서 맘 편하게 사람들과 왁자지껄 수다 떨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열정과 에너지 충만한 요즈음 주무관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늘 불완전한 점심시간의 자유는 또 다른 불안감을 일터에 불러올 수밖에 없다.


도대체 점심시간이 뭐라고. 오늘도 나는 그 시간에 대해 논문이라도 한편 쓸 기세로 여기다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는 걸까. 당연한 권리가 당연한 것이 아니기에. 어느 20대의 발랄한 주무관에게는 '미움받을 용기'로 단단히 무장해야 하는 현실이 그저 씁쓸할 뿐이다. 공무원에게 점심시간의 자유는 진정 사치스러운 것일까? MZ세대의 '공직 탈출'을 줄일 방법, 여기서부터 실마리를 찾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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