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의 직급

영지의 고민상담실 18

by 영지

"그 직원 몇급이야?"

"말을 그렇게 해?"

"헐~서기보네! 벌써부터 일도 미루고..."

"아직 9급이어서 그런 듯. 이해해야지."


다른 누구도 아니다. 과거의 내가 혹은 동료들과 함께 무심코 툭툭 내뱉은 말들이다. 그나마 이렇게 글로 옮기면서 수위 조절을 한 게 이 정도니 실제 어땠을지는 읽는 이의 상상에 맡긴다. 반대로, 내가 공직 초년생이었던 시절에는 아마도 비슷한 불만이나 불평들을 선배들에게 꽤 많이 듣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며칠 전부터 읽고 있는 <불멸의 신성가족> (부제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김두식 지음)이란 책에 2009년 1월 서울지방변호사협회가 대법원에 전달한 '법관평가' 사례가 나온다. 일부 판사가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변호사를 심리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많이 던지는 질문이 "연수원 몇 기냐?"라고 한다. 선배에게 대들지 말라는 일종의 신호다. 그 지점에서 순간 멈칫했다. 내게도 낯설지 않은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도 어려 보이고 거기에 직급까지 낮은 직원들과 업무적으로 불편한 상황에 놓일 때가 종종 있다. 사실 일부 판사들은 그걸 대놓고 입 밖으로 말한 것뿐이다. 정당한 요청임에도 나보다 낮은 직급에 나이까지 어리다면 '당돌하다'는 생각과 함께 직급으로 어떻게든 그 직원을 눌러버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공무원 조직이든 법원이든. 스스로 필요해서 옷을 벗을 때까지 자리가 보장되는 직업은 결국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것이 맞는 걸까.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직급으로만 상대방을 평가하기 시작했을까. 공직에서 무엇이 나를 그런 '꼰대'같은 선배로 만들었을까. 과연 직급이 전부인 걸까. 그 '꼰대' 뒤에는 또 무엇이 단단히 버티고 있는 건지 새삼 궁금해졌다.


"네, ㅇㅇㅇ입니다."

"안녕하세요, ㅇㅇ과 ㅇㅇㅇ입니다. 질문 좀 드려도 될까요?"

"아, 네. 말씀하세요."

"보내주신 자료를 봤는데요. 제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달라서요."

"그래요? 어디 가요."(당황)


얼마 전 일이다. 내가 이메일로 각 부서에 배포한 자료에서 오류를 발견한 타 부서 직원의 전화였다. 업무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내가 그토록 집착하는) 직급도 겨우 8급이었다. 하지만 1년 이상 이 일을 맡고 있는 나보다 더 날카롭게 자료의 오류를 발견해서 나에게 알려준 것이다. 순간 부끄러움과 함께 후배들을 은근히 평가절하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어떤 업무는 갓 들어온 신입이 선배들보다 일을 훨씬 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공무원 조직에서는 그 업무에서 최소 근무기간(대부분 6개월~1년)을 채워야지 상이든 표창이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너무 어리다고, 직급이 낮다고 아예 상주는 대상에서 제외하는 경우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오래 다녔다고 업무능력은 깡그리 무시하고 '나눠먹기식'으로 그 부서에 온 순서대로 주는 것이다. 이번에 A가 받았으니 다음번엔 그다음 오래된 직원 B가 받아야 한다는 뭐 그런 거다.


매사가 이런 식이면 솔직히 누가 열심히 일하고 싶을까. 상이란 건 모름지기 여러 사람들 중에 특히 일을 더 잘한 사람에게 줘야 하는 건데. 그래서 사정상 부서를 자주 옮기는 사람은 운이 없으면 몇 년 동안 흔한 상장 하나 못 받는 경우가 많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식의 직급별, 선임 순으로 상을 주는 문화는 업무에서도 직급이 낮으면 의례 능력도 지식도 낮게 평가해버리는 분위기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몇 급인데...'라고 내뱉는 버릇은 그렇게 깊고도 폭넓은 조직문화에 그 출발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나조차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 확 뽑아버리지도 못하고 겨우겨우 티 안 나게 버티는 중이니 말이다. 대놓고 말하는 일부 판사님들은 그나마 솔직하기라도 하다고 해야 하나. 비겁하게 속으로 후배들을 편협하게 평가해대던 나란 공무원은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다시금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솔직히 직급별, 고참순으로 더 많이 가져야 하는 건 상이 아니라 '일에 대한 책임감'이 아닐까. 하지만 실상은 좀 슬프다. 막상 일이 틀어지면 (대부분은 어리고 직급이 낮은) 업무 담당자부터 찾는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추궁이 시작된다. 순진한 후배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직급과 오래된 순서대로 당연한 듯 반짝반짝 빛나는 상을 척척 받아 들던 그 선배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아주 일부의 이야기다. 대부분은 안 그럴 것이라 나도 믿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바깥세상에 비해. 여기 내가 몸담은 조직은 '딴 세상' 마냥 어딘가로 확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다들 아무 일 없는 듯 잘만 살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자꾸만 나는 기울어진 바닥이 신경 쓰인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해야할까. 뭐라도 잡아야 똑바로 설 수 있는데 말이다.




"인사기록카드 기록이 너무 깨끗해서 민망하네..."

"....."(다들 의아한 듯 바라본다)

"내가 수십 년 동안 받은 표창이 딱 하나야. ㅇㅇ상!"(웃음)

"어머, 그게 가능한가요? 근무년수가 얼마신데..."

"사실, 예전부터 표창 명단 내라고 내려오면 (열심히 일한) 직원들 먼저 챙기는 게 맞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이제 퇴직이 몇 년 안 남은 지금) 막상 인사기록을 보니 진짜 내가 안 챙기긴 했네"(허허허)


한달 전쯤인가 우연히 들은 어느 ㅇ장님의 표창에 대한 사연이다. 이런 말이 있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 이런 분이 나와 같은 조직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종종 힘 빠지는 현실에서 내가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불안한 듯 비스듬하게 서 있는 내 몸을 다시금 똑바로 세울 수 있는 지지대를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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