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네심'이 필요하다!
대학원 첫 학기가 남긴 3가지
그저께다.
대학원 1학기 성적이 공개되었다. 결과가 사실 좀 놀라웠다. 하지만 앞으로 남은 기나긴 여정에서 겨우 시작점을 찍은 것이기에. '잘하자!'가 아닌 '완주하자!'로 마음을 이미 고쳐먹은 게 있다 보니 금세 성적에 대한 생각은 털어버렸다. 그리고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 친해진 몇몇 사람들에게 '건강하게 다음학기 만나자'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이라고 해봤자 8월 중순이다. 두 달 동안 잠시나마 과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니. 그토록 기다리던 자유다! 내가 자처한 공부이지만 그래도 방학은 방학이라서 좋다.
그렇다.
지난 4개월. 일과 공부를 (6년 만에 다시) 병행하면서 중요하게 깨달은 사실 세 가지가 있다. 공부나 일 자체가 중요한 게 결코 아니었다. 일과 학업을 같이 하지 않았다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그런 것들. 바로 '체네심'이다. 한 학기 매주하루이틀씩 서울을 오가면서 내가 비로소 얻은 것이 있다. 무슨 일을 하든 '체네심' 없이는 완주를 바라면 안 된다는 것. 특히, 대학원 공부를 하려거든 더더욱! 체력, 네트워크 그리고 진심의 '체네심'이다.
먼저, 체력이다.
지금 대학원은 전일제인 풀타임 연구원들과 나 같은 파트타임 연구원들이 같은 반에서 동일한 조건으로 강의를 듣고 과제물을 내고 평가도 받는다. 특히, 토요일 오전오후 강의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연구원들은 (2월 말 학기가 시작) 3월 중순이 되자 하나둘씩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뚜렷했다. 나 또한 3월부터 안과를 시작으로 병원과 약국을 수시로 다녔다. 매주 제출하는 리포트와 발표에 대한 압박감은 평일 퇴근을 하고도 주말이 되어도 나를 편하게 놔두질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학교에 가지 않는 일요일은 무조건 조정동호회를 나가는 것이었다. 배 타기 전 준비운동은 물론이고 땀이 흐르도록 미친 듯이 노를 저었다. 그 덕분일까. 5월 말 이제 학기 마지막을 달려가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 학교공부에 적응이 된 것도 있겠지만) 체력은 더 이상 나빠지진 않았고 남은 집중력을 끌어모아 과제를 기간 내 제출했다. 지난주 토요일 오후 3시.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학교 앞에서 처음으로 같은 반 사람들과 치맥도 하고 차도 마셨다. 매번 강의실에서 과제 얘기만 하다 서로서로 소소한 일상 이야기에 시종일관 유쾌함이 넘쳐났다. 그 시간 나는 내 앞의 사람들에게 결국 체력이 '전부다'라는 말을 꽤나 했던 것 같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그저 체력이라고. (모임비 정산을 위해 만든 단톡방 이름도 내친김에 그냥 체네심이리고 지어버렸다)
다음은 '네트워크'.
대학원 공부하는데 네트워크가 왜 필요할까. 그건 워낙 방대한 연구자료들의 출처와 공동연구에 대한 가능성 때문이다. 사실 본격적으로 논문이든 연구분야에 뛰어들기 전에는 공부는 오롯이 혼자서 하는 싸움이라고 막연한 추측을 했다. 하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가서 부닥쳐보니 나의 예상은 살짝 빗나갔다. 정보와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혼자가 더 경쟁력이 있을까 (시너지를 아는) 여럿이 함께 머리를 맞대는 것이 나을까. 일단, 제한된 시간 내에 방대한 자료들 중에 필요한 자료를 찾아내는 작업은 더더욱 혼자보다는 그룹이 더 효율적이고 또 빠르다.
그리고 발표된 국내외 학술논문들 중에서 둘 이상 하는 연구의 비중도 꽤나 높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학위논문은 연구자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써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 학술지 게재나 콘퍼런스 발표와 같이 연구자들이 함께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꽤나 많았다. 이번학기 4~5명 정도로 연구모임을 만들어서 관심 있는 분야별로 함께 연구를 해보자는 제안을 이미 받았을 정도다. 뭐 겨우 한 학기 경험한 걸 가지고 뭔가 심오한 결심을 할 수준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부에 네트워크는 필요하다는 걸 점점 강하게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새로운 이론을 만들고 정립하는 건 나 혼자의 몫이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네트워크는 연구자에게 의미 있는 연결(성)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나는 막연하게나마 믿게 되었다. 앞으로 학기가 거듭되면서 이 믿음의 방향이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연구자적 기본자세라면 온 사방이 열린 형태의 개방형 조직인 네트워크가 과연 크게 문제가 될까 싶다.
마지막으로, '진심'이다.
말 그대로 진심이다. 진심, 진정성. 뭐 이런 말이 너무 식상해도 어쩔 수가 없다. 당연한 것이니까. 자주 여기저기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진심이다. 앞에서 말한 체력과 네트워크. 결국 이런 것들을 나만의 강력한 무언가로 바꿔놓는 것도 연구와 학업에 대한 나의 진정성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구든 공부든 일이든 사람이든 관계없이. 바로 앞의 대상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과 열정이 그 바탕에 없다면. 내가 하는 그 어떤 것도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진심은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붙들어두는 버팀목이 된다. 반면 그만큼 끝까지 지켜내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체력과 네트워크는 그 진심을 지겨내기위한 보조수단이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와서 관심이 가고 먼저 연락했던 대부분은 무엇보다 진심 어린 무언가가 느껴졌던 사람들이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과제 준비를 위해 논문을 내내 읽으며 다녔다는 어느 국책기관의 직원. 지방 출장 강의 후 비행기를 타고 와서 수업시간에 겨우 맞춰서 들어갔다는 회사대표. 내게 학교에서 사람관계의 첫 번째 조건을 질문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연구든 뭐든 '진심'이 느껴져야 한다고 답할 것이다. 매사에 진심인 사람들과의 네트워크만큼 나에게 치명적인 것이 또 있을까.
오늘은 방학을 하고 첫 번째 맞은 주말 일요일이다. 어제는 친구와 강원도의 어느 산 정상을 밟았고 오늘은 호수에서 조정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탔다. 산은 산대로 호수는 호수대로. 그 시간과 공간이 나에게 주는 감동은 제각기 달랐다. 대학원 생활의 종착지까지 여정도 아마 또다른 감동의 시공간이 될 것이다.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은 지금도 앞으로도 똑같지 않을까. 튼튼한 두 다리, 함께 할 누군가 그리고 순간순간 진심으로 즐기는 마음까지.
내겐 '체네심'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