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워킹맘 그리고 영국(9)
다시 런던가는 기차안
맨체스터에서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이다. 푹신한 카페트 바닥에 여해가방 바퀴의 잔해들이 널부러져있다. 혹시나해서 얼른 조각들을 주워서 짐놓는 트레이 올려두고 내자리로 돌아왔다. CoachE Seat 10.
표를 사면서 아이와 옆자리를 부탁한 후 테이블이 딸린 자리도 요청했더니 역무원이 두번째 요청만 들어주었다. 나와 아이는 같은 기차 칸에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 대신 아이는 혼자 테이블이 딸린 자리를 차지했다. 마음에 썩 들지않는 표정이지만 어쩔수 없다는 것도 잘알고 있는 듯했다.
의도치않게 처음으로 아이와 떨어져 앉아 가는 여행이다. 서서히 엄마에게서 독립을 준비할 나이가 되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이렇게 여행에서 맞딱뜨리는 사고는 그래서 겪을만 하다. 상황상 어쩔수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아이도 배우는 것이다.
아침 10:15 맨체스터 피카델리역 출발, 낮 12:27 런던 유스턴역 도착. 2시간 남짓 기차여행은 한국이든 영국이든 설레는 일이다. 호텔 체크아웃 후 기차역을 향해 걸어오는 길. 아이에게 지도찾는 일을 맡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다가 이상해서 다시 확인해보니 영어에 서툰 아이가 피카델리 '역'이 아닌 '공원'을 검색한 걸 알게되었다. 평소 덤벙대는 성격이 그대로 나온 결과였다. 미안해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나는 늦기전에 기차역을 가는게 우선이라며 아무일없는듯 길을 재촉했다.
실수에 대한 용서와 관대함. 감정적인 대응에 머물다가 방향을 잃는 실수를 하지않는 것. 중요한 건 계속 앞으로 나아가서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기차칸 작은 창문 너머 스쳐지나가는 영국의 시골 풍경. 한국과 큰 차이는 없다. 집이 붉은 벽돌로 지은 것이 많다는 것과 집 앞마당에 잔디가 아주 잘 가꿔져 있다는 것 정도다. 작은 차이일지는 몰라도. 튼튼한 벽돌집이 주는 안정감은 또 모를일이다. 푸른 잔디가 깔린 앞마당이 선사하는 싱그러움은 또 모를일이다. 매일아침 푹신한 잔디를 밟으며 출근하고 등교하는 사람과 회색빛 딱딱한 아스팔트 도로를 걸어가는 사람의 마음은 분명 다를수 있겠다 싶다.
영국에서 9일간의 시간은 알게모르게 나와 아이에게 안정감을 준듯 하다. 일상의 여유랄까. 나도 그렇고 아이도 지금까지 조금은 팍팍하게 살아왔음을 이곳의 여유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여기 사람들이 보여준 작은 친절과 배려, 몸짓 그리고 미소. 그런것들 하나하나가 내안에 쌓이고 쌓여 나도모르게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느낌이다. 환경의 중요성. 함께 생활하고 마주치는 사람들의 의미. 그들의 행동과 말에서 전달되는 긍정과 부정 그리고 모호함까지. 온갖 메시지들이 알게모르게 우리 의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9일간의 첫 유럽여행, 영국에서의 시간이 내게 준 선물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더 많은 사람들과 물건들 공간들이 나의 탐험을 기다리고 있다. 영국사람들. 영국의 물건들. 영국의 장소들. 9일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정이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내 마음의 '가방'에 담았을까. 이번 여정은 물건보다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감동과 인상을 가방에 가득 채운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 느끼고 공감하고 토론하면서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한 것. 그 누구도 아닌 아이에게 엄마와 함께 이런 멋진 여행이 가능함을 알게 한것이 너무도 행복하다.
창밖으로 평화로운 영국의 전원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언제나 푸르게 빛나고 있는 잔디와 갈색빛의 나무들. 붉은 벽돌집들. 간간히 풀을 뜯고있는 가축들(소인지 양인지 구분이 안된다) 송신탑은 한국이나 영국이나 비슷하게 생겼다. 가로등도 비슷하고 옆자리 영국 청년들이 무심하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모습도. 그렇다. 여러 비슷비슷한 광경속에서도 특별함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싶다.
여기 영국, 맨체스터의 특별한 점은 남자미용실이 엄청 많다는 것이다. 거의 한집 건너 하나씩 바버숍이 있고 가게마다 젊은 남성 손님들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드문드문 여성 고객도 보였지만 절대적으로 젊은 남성고객이 많았다. 이곳 영국에서 남자들의 외모, 특히 헤어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내게 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여행 며칠전부터 머리 좀 깎고 오라는 나의 말을 듣지않고 끝까지 버티기를 하다가 결국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로 여행을 떠난 아들과의 신경전때문이다. 영국 런던에서 만난 깔끔한 남자들의 스타일에 아이도 나름 충격을 받았는지 첫 이틀은 머리를 자르겠다고 졸라댔다. 살인적인 런던 물가에 이내 포기했지만 아이눈에도 내가 본 그 특별함이 보였던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