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언니) 좀 됐지. 그냥 그렇게 됐어. 안식년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여행 다니면서 쉬고 있지. 안 그래도 곧 치앙마이로 2주간 여행 가려고. 숙소랑 항공 예약은 끝냈어. 혹시 시간 되면 며칠 쉬러 와. 방은 2인실이니까.
(영지) 언니, 힘내요. 그래도 여행도 다니고, 잘 쉬는 것 같아서 보기좋아요. 치앙마이라... 이름부터 아주 솔깃하네요.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볼게요
(선배언니) 진짜야? 네가 오면 너무 좋을 것 같아!(웃음)
그로부터 2주 뒤
불 꺼진 비행기 안.고도 몇 미터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대기와 비행기 표면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웅장한(?) 소음만이 내 귀를 괴롭힌다. 어둠 속에서도 저마다의 손에 들린 세상과 소통하는 조그만창을 통해 기내 방송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5시간 남짓 비행인데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탑승을 기다리면서 고민 아닌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나도 그랬으니까.
나의 마지막 비행은.
올해 1월샌프란시스코행이었다. 10시간이 넘는 시간. 도대체 뭘 하면서 그 긴 시간을 보냈는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업무로 가는 출장이었기에 현지 일정도 다시 확인하고 중간중간 노트북도 꺼내고 책도 꺼내서 읽었던 짧은 단상들 외엔 10시간을 어떻게채웠는지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오늘처럼 뭔가 처음 하는 걸 하지 않았기에 뇌의 기억창고도 그 시간을 뚜렷하게 담아두진 않았나 보다. 그렇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싶다. 탑승게이트가 열리기 전에도 수첩을 꺼내서 잠깐 당시의 생각을 한 페이지정도로 정리했는데, 비행기가 이륙하고 대기권 가까이 다가가자 또 글이 쓰고 싶어 졌다. 뭐 이럴 때도 있는 거지.
사실 기내에서는 처음 쓰는 글이다.
요즘처럼 학기 중에 여유롭게 앉아서 글을 쓸 마음의 여유가 도통 안 생길 때 이런 마음은 너무도 반가운 것이다. 뭐 인생에서 첫 경험은 뭐든 환영이고 또 나름 즐길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기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면 할 말도 없지만, 한 번이라도 해봤으면 뭐든 할 말이 생기는 거니까. 아무튼. 치앙마이로 가는 비행기도 처음이다. 이 공간을 공유하는 대부분 사람들이 나처럼 여행객이 아닐까 싶다. 갓난아이를 동반한 부부와 어르신들도 간간이 보이고 특히 초등학생을 동반한 가족들이 유난히 많다. 나도 치앙마이라는 도시가 태국에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그 이름은 어디선가 몇 번 들어봤기에 지난번 식사자리에서 대학원 선배언니가 갑작스럽게 맞이한 퇴직을 기념한 안식년(?) 여행에 나를 초대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치앙마이.
솔직히 이름 자체가 주는 유쾌함이 있다. 서울, 수원, 대구, 광주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경쾌함같은 것. 그래서 더 편하게 이곳을 갑자스러운 여행지로 선택할 수 있었다. 아무튼. 기류와 비행기가 만들어내는 ‘윙~’ 소리가 이제는 익숙해진 것일까. 그 소리에 장단을 맞춰서 키보드 위를 분주하게 오가는 열개의 손가락들. 노트북 모니터가 발산하는 빛에 그 손가락들은 마치 발레 무대의 무용수라도 된 듯 통통 뛰어다닌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자세를 바로잡고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아까 드문드문 보였던 작은 모니터 불빛들이 그사이 많이 줄어들었다. 2시간쯤 지났을까. 슬슬 잠이 몰려오는 시간이 된 것이다. 나는 오늘 아침 오래간만에 9시까지 푹 잔 덕분에. 커피도 무려 2잔을 마셔서 그런지 그다지 피곤하지도 졸리지도 않는다. 그저 치앙마이로 가는 비행기 안의 나를 기록하고 이 순간을 남기로 싶은 의지만 가득하다. 뭐 그다지 특별한 내용도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빈 페이지가 새까만 텍스트로 가득 채워지는 것만으로도 나는 왠지 뿌듯하다. 처음으로 기내에서 쓰는 글이라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란 걸 가진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기에.
일과 학업 그리고 운동.
한국에서의 바쁜 일상에서 오늘처럼 3박 4일 짧은 여행을 무작정 떠날 수 있는 용기를 낸 것도 그렇고. 이제 나는 치앙마이든 어디든 필요하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머리가 복잡하든 아니든 관계없이. 그냥 훌쩍. 어디든 낯선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는 나에게 그것 이상의 많은 것을 내 인생에 가져다줄 것이다.
무한한 기회의 창.
그것은 바로 이런 크고 작은 용기의 발휘를 통해 열리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기내에서도 글을 통해 내 마음을 정리하고 표현하고 주변을 관찰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주변에 스며들고 환경에 적응하는 내 모습에 다시금 놀라면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 아닐지.
낯선 뭔가를 하는 것.
이런 일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면 이제 내가 정복해야 할 두려움이 또 있을까. 낯선 사람 정도? 여전히 많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뭔가를 하나 뛰어넘고 있다는 막연한 깨달음 비슷한 걸 느낀다. 이 여행이 내게 준 의미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장애물 혹은 두려움의 벽을 내가 스스로 뛰어넘었다는 것이 아닐까. 웨이트 운동을 시작하면서 나에게 체지방 감량에대한 고마움과함께 두 번의 강습약속을 펑크 낸 PT선생님의 '미숙함'까지 내가 "그럴 수 있죠"라며 수용하고그 이후 수개월을 함께 했던 것도.(결국 첫 선생님과는 같은 문제로 수업을 완주하지 못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런종류의 (용서가 아닌) ‘용기’가 아니었을까.이렇게 낯선 여행지로 향하는 기내에서 스스럼없이 노트북을 꺼내어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는 것이 용기와 별반 다를 것이 있을까. 새로운 감정이든 결정이든 사람이든 여행이든 관계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다면.그것이 어쩌면 내가 넘어야 할 가장 높으면서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요즘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뛰어넘으며나를 시험하고 있다.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그 실체를 내가 벗겨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최근 나의 행보는 (내가 생각해도) 꽤나 파격적이다. 하지만 자연스럽다. 나답다. 그래서 거리낌이 없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가까운 사람들이 거부감보다는 "멋지다"라는 표현을 더 자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부분은 의아하다고 속으로 생각할지도...) 뭐 그렇다. 이런 모습이 바로 진짜 나란 사람이기에. 지금까지 나는 너무 많은 프레임에 나를 끼어 맞추면서살아온 게 아닌지. 이제 내게 남은 생애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내일, 모레, 다음 달... 언제 또 무슨 일이 내 일상에 생길지도 모르는데. 그동안 나는 너무 정해진 틀에다 스스로를 가둬 놓고 살아온 느낌이다.
"운동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최근에 바뀐새 트레이너 선생님이며칠 전 강습때 했던말이다. 사람의 몸이재각각으로 생겼기에 그에 맞는 운동의정답도여러 개라는 의미로 나는 이해했다. 그렇다.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정해진 틀이 곧 정해진 일상의 정답인 듯 알고 살아온 것이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었다면. 이제 나는 일상을 나만의 정답들로 다채롭게 채우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해볼 작정이다.
이륙을 하고 벌써 2~3번이나.
기류의 영향으로 식사 서비스가 중단되었고,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밥을 먹다가 잠시 멈추고 잠잠해질 때까지 다시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내 여정의 종착점인 치앙마이공항까지 또 얼마나 많은 기류를 만날지 알 수가 없다. 견딜만한 기류도 물론 있을 테지만 한두 번은 꽤나 심한 기류를 만나서 이렇게 글을 쓸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상의 매 순간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용기를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발휘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일상을 채운 사소한 용기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내 인생의 종착점까지 연결되듯이말이다.
나는 용기를 더 낼 필요가 있다.
나는 더 새로운 것들을 접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씩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그래야 한다’는 ‘정답’이라는 허상들을 끊임없이 바깥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그리고 가급적 가볍게 단순하게 머릿속과 마음속 공간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나만의 답들을 담을 수 있다. 그래야 더 포용할 수 있다. 그래야 더 들을 수 있다. 그래야 더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의 다양한 생각과 가치들. 나아가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까지.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를
진심으로 변화시키길원한다면, 가장 먼저 나부터 비워내야 한다. 수시로 비우고 채우고 비우고 채우고. 내 마음과 머릿속은 그렇게 새롭고 오래된 것들이 채워지고 비워지는 과정 속에서 점점 그 벽이 얇아지고 투명해질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벽 자체가 없어져서 세상과 내가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더 이상 내가 고뇌하지 않는 바로 그 시점. 그 지점이 어쩌면 내 생에 최고이자 마지막 순간이 되겠지.
2024년 10월 어느늦은 저녁 치앙마이행 비행기.
이 비행기를 타기까지 내가 만든 용기는 과연 몇 개였나.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두어 번 정도다. 학교 선배언니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받은 그 순간과 가족들에게여행계획을 이야기하던 때. 당연히 두 번째 용기가 훨씬 더 어려운 것이었고 포기할 뻔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냥 욕먹을 각오든 용기든 뭐든나다운나를 위해 버텨냈고, 당시는 꽤나 죄책감 비슷한 걸 느껴야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냥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내가 하는 일이 틀린 일은 아니기에. 단지 '드문 일'이다. 앞으로 나는 더 자주 이런 종류의 '드문 일'을 만들 작정이다.
운동에 정답이 없듯, 인생도 정답이 없다!
나는 진정한 나로 오롯이 살기 위한 용기를 마음껏 발휘하면서 살 작정이다. 이번처럼 몇 번 시험적으로 해 본 결과, 뭐 나쁘지 않다. 왜 진작에 이렇게 살지 않았나 싶다. 무엇을 위해. 도대체 누구를 위해. 나는 정답이라는알 수 없는다른 이가 만들어 놓은 틀에 스스로를 가두는 삶을 살았을까. 이제라도 나는 진짜 내가 원하는 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어디서? 치앙마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더 자신 있게.
더 단순하게. 더 명료하게. 더 유쾌하게.
나 자체로 사는 생이 무엇인지 일상에서 실천하는 삶.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내가 먼저 행동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내가 인생에서 가져야 할 유일한 정답이 아닐까.
먼저 행동하고 실천하는 삶.
그것이 유일하게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열쇠라는 것을 나는 요즘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 내가 먼저 해보는 것. 여행도 운동도 공부도 반성도…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실천하는 데 있어 그 어떤 것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꽤 긴 글을 써내려 오는 동안.
주변이 더 깜깜해졌다. 바로 옆자리 사람만 제외하고 주변 승객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나도 슬슬 눈에 피로감이 몰려온다. 아침 운동을 너무 열심히 했는지 심하지는 않지만 허리 통증도 신경이 쓰인다. 이 정도면 첫 기내 글쓰기 도전에서는 성공적이라고 자부해도 되지 않을까. 시간이 흘러 이 글을 다시 읽어본다면 또 어떤 느낌일지... 너무 두서없이 쓴 느낌이지만. 그래도 이런 의식의 흐름에 충실하게 따른 글도 어떻게든 인생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름 합리화를 해본다. 아! 더 이상은 모니터를 볼 수 없다. 눈을 감고 어둠 속에서 휴식을 취하자. 1~2시간 후면 착륙일 텐데. 지금은 용기보단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다...(치앙마이 여행후기는 다음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