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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부지, 고기 하나만"

돼지고기 김치찌개_ 2020 우리家한식 공모전 출품

by 베짱이J


구수하고 새큼한 향이 올라온다. 돼지 기름이 속속들이 밴 배추줄기는 절로 침이 고일만큼 달고 부드럽다.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나는 입을 벌리고 말한다.


"하나부지, 나 고기 하나만."


할아버지는 샐쭉 눈을 흘기시더니, 젓가락으로 커다란 고기를 골라다 입에 넣어준다. 내가 우물우물 씹는 동안 두 살 아래 여동생이 입을 벌린다. 나, 동생, 나, 동생. 연달아 고기와 김치를 넣어주던 할아버지는 이럴 바에야 알아서 먹으라고 투덜대시는데, 그러면 우리 자매는 기다렸다는 듯 숟가락을 들고 와 할아버지 곁에서 찌개를 퍼먹는다. 짭조롬하고 고소하다 못해 단 맛까지 나는 그 찌개는, 우리집 '할아버지 찌개'다.






세상에 흔히 '돼지고기 김치찌개'라 알려진 음식을 우리 자매는 오랫동안 '할아버지 찌개'라 불렀다. 약주를 좋아하시는 할아버지는 점심 때면 곧잘 삼겹살을 굽거나 찌개를 끓여 소주와 드셨는데, 특히 잘 익은 신김치와 비계 낀 돼지고기를 슴덩슴덩 잘라 끓인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제일 좋아하셨다. 돼지고기 김치찌개는 냄새부터가 압권인지라, 동생과 난 베란다에서 소꿉놀이를 하다가도 냄새를 맡으면 뛰쳐나갔다.


사실 까놓고 보면 이것만큼 만들기 쉬운 찌개가 또 있을까. 이 찌개에서 중요한 건 재료이지, 스킬이 아니다. 사소한 조리법 변화만으로도 맛이 달라지는 일부 한식과 달리, 돼지고기 김치찌개는 잘 익은 신김치와 질 좋은 고기만 달달 볶다 물 붓고 끓이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 별 것 아닌 찌개를, 나의 친가에선 할아버지 혼자 오래도록 독점하셨다.



우리집 할아버지 찌개



할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오신 것은 1969년의 일이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광주 인근에서 대나무 도매상을 하시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 사기꾼을 만나 돈도 털리고 대나무도 털리셨다. 일종의 선물 거래를 하셨던 건데, 어느 날 밭주인이 연락이 안 돼 찾아가자 대나무는 몽땅 베어 팔아먹고 미리 준 대금도 꿀꺽한 채 야반도주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개털이 된 할아버지는 당신 말마따나 '불알 두 쪽만 딸랑딸랑 달고' 상경하셨다. 그리고 이 년 후 아내와 사 남매를 데려오기 전까지 온갖 일을 해 셋방을 구했다.


그렇게 올라온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할아버지는 서럽고 고되었던 게 많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답할 것이다. 학식도 기술도 없는 이가 줄줄이 딸린 처자식 입에 풀칠이라도 시켜주려면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닥치는대로 일하셨다. 구청 일용직으로 일하는 한편 인형 만드는 공장에 나가고, 공사판에서 흙을 부리며 건물을 쌓았다. 은퇴 후에도 집 안팎 수리할 데가 있으면 익숙하게 공구리를 치신 것은 그 때의 경험 덕택이리라.


고단토록 일한 것에 비해 매일 저녁 반찬이 부실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대부분의 찬은 김치나 나물류였고, 간혹 달걀 프라이라도 올라오면 그보다 더 훌륭한 게 없었다고 우리 아빠는 종종 회상한다. 그러나 이따금 할아버지가 너무 지쳤을 때나, 돼지고기를 싸게 살 수 있었을 때, 할머니가 큰 맘 먹고 끓이시던 게 바로 돼지고기 김치찌개였다. 적은 고기나마 물에 끓여 모두가 맛볼 수 있고, 또 소주에 곁들이기 좋아 할아버지가 애정하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아들딸들이 지나치게 찌개에 달려든다 싶으면 아버지 드셔야 한다며 제지하셨다. 그게 버릇으로 남아 형편이 펴고 그럴듯한 중산층 행세를 할 수 있게 된 다음에도 돼지고기 김치찌개는 항상 할아버지 몫이었다.






간 크게도 그런 찌개를 대놓고 넘본 게 바로 나와 동생, 우리 자매였다. 열 네 살까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우리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닭발이니 곱창이니 하는 것들을 먹고 자란 통에 고기 찌개 맛도 일찍 알았다. 남도 분인 할머니 요리이니 자극적인 것은 당연지사였으나 네 살 때부터 뻘건 생김치를 날름날름 받아먹은 우리에겐 껌이었다. 이런 식의 침탈(?)에 익숙지 않으셨을 할아버지도 우리가 건드는 건 너그러이 용인하셨다.


기실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는 항상 우리에게 그런 식이셨다. 성정이 무뚝뚝해 누구에게도 살갑지 않으셨지만(한 번은 우리집에 놀러온 친구가 할아버지를 보고 울어버렸을 정도다), 손주들에게만큼은 속정이 남달랐다. 우리 자매뿐만 아니라 사촌들까지 도합 여섯이나 되는 애기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맡겨졌는데, 그 많은 올망졸망이들을 살뜰히 돌보셨다. 심술 부리시는 것 같아도 뒤에선 몰래 사탕을 챙겨주고, 성가신 장난을 수십 번씩 걸어도 받아주던 게 할아버지였다.


그 정이 컸던지 우리집이 분가하게 됐을 때, 평생 안 우실 것 같던 할아버지가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이를 어쩌면 좋누, 시집보내는 것 같아서....' 중학생이었던 손녀는 어이가 없어서, 시집은 무슨 시집이냐고, 뻔질나게 드나들테니 걱정마시라 단도리했지만 실제로 명절이나 생신 때가 아니면 잘 가지 않았다. 고백건대 그건 한 해 한 해 치열해지는 입시 때문이기도 했고, 할아버지를 보러가는 것보다 더 재밌어보이는 온갖 잡동사니 탓이기도 했다. 그때까지 장가들지 않고 있던 막내 삼촌은 내게 전활 걸어 한 번 살펴봐드리라 말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몇 번 뿐이지 주기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다시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도 몇 년이 지난 15년 봄, 대학교 3학년 때다. 방광암이었다. 타고난 강골로 생전 아프신 적 없던 할아버지가 언제부턴가 아랫도리 부근이 당긴다 하시더니 하루하루 말라가셨다. 의사는 연세가 상당해 항암치료도 견디지 못하실 거라고, 뭐라도 손 써보려면 체력부터 회복하셔야 한다고 말했다. 그 날로 할아버지를 모셔온 부모님은 매 끼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식으로 챙겨드리려 애썼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일이 닥치고 보니 할 수 있는 거라곤 요리밖에 없어서, 연어볶음밥, 베이컨말이, 돼지고기 김치찌개 등을 두서없이 해다 드렸다. 그러나 식도와 위가 약해지신 할아버지는 거의 드시지 못했다. 해줘서 고맙다는 말만 연거푸 하시며 그나마 부드러운 달걀 샌드위치 따위를 돌 씹듯 삼키셨을 뿐이다.


두 계절을 함께 보내며 나는 그 분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했다. 매일 오후 할아버지는 거실에 앉아 멀거니 햇볕만 내다보셨다. 한때 부리부리한 눈매의 잘생긴 청년이자, 낯설고 물설은 대처에서 어떻게든 자식 가방끈만큼은 안 끊어지게 하려 애쓰던 가장은, 더이상 바라는 게 없다는 듯 물상(物象)처럼 앉아있기만 했다. 그게 마음 아파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영화를 틀고 젊은 날 얘기를 부러 물은 날이 여럿이었으나, 시력과 청력이 약해진 할아버지껜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나는 간혹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몸이 나아지시더라도 항암치료를 견디실 수 있으실까. 치료를 받고도 완쾌하실 수 있을까. 게다가 그 해 가을, 난 오랫동안 준비해온 교환학생을 가야 했으니.



1592730515387.jpg 카츄사 시절의 할아버지






끝내 할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건 미국인 친구가 여는 하우스 파티에서였다. 싸구려 양주와 맥주가 즐비한 기숙사 아파트에서 한창 라임을 빨아먹던 내게 부모님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베짱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ㅇㅇ대병원에서 장례할 거야', '어차피 오기 어려우니 너무 신경쓰지 말아라'. 할아버지의 병세가 날로 악화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내가 귀국할 때까진 버티실 거라 여겼던 막연한 기대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문득 손에 쥔 라임조각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숨이 막히는 것도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기숙사로 돌아가 혼자 울고 있었다.


부모님은 고작 삼 일간의 장례를 위해, 그리고 이미 오래 짐작했던 일로 인해 도합 스무 시간이 넘는 왕복 비행을 하는 것이 불요하다 여기셨다. 마침 기말고사가 가까워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무언가 이율배반적인, 께름칙하고 답답한 감정이 노트 필기를 외우는 시간 틈틈히 스며들었다. CGPA에도 안 들어가는 교환학생 성적 따위. 잘해봐야 이백이나 할 비행기 표값. 그것들을 지키려 당신의 장례에 가지 않는 것이 과연 마땅한 일인가. 그러나 머뭇거리는 사이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나는 어벙벙하게 기회를 놓쳤다.


그 때의 선택이 잠깐의 찝찝함으로만 남지 않을 것임을 안 건 귀국하고 나서였다. 눈 내리는 겨울날,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다는 내 말에 엄마는 돼지 목살을 가득 넣고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였다. 순식간에 고소한 누린내와 새콤한 김치향이 온 집 안을 점거했다. 신이 난 나는 사기 그릇에 양껏 찌개를 펐다. 기름기 가득한 붉은 국물을 한 입 먹는 순간, 갑자기 당연한 인과처럼 첩첩이 쌓인 기억들이 밀려왔다. 개다리 소반 앞에 할아버지와 나란히 앉아있던 날들. 할아버지의 찌개 냄비를 넘보다 국자까지 들고 퍼먹던 나. 짜다고, 밥이랑 먹으라고, 밥그릇에 수수섞인 쌀밥을 담아주던 할아버지. 그 날 알았다. 아, 나는 이걸 밀어내지 못하겠구나. 할아버지와의 기억들을, 당신의 살뜰했던 정을, 마지막 가시는 길 배웅조차 하지 않은 나의 몰염치를. 앞으로 평생 '할아버지 찌개'를 먹을 때마다, 당신께 빚진 죄책감이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리라는 것도.






할아버지께서 가신 지 5년 여가 흐른 지금, 나는 가끔 궁금해진다. 이역 만리란 이유로 장례식조차 가지 못했던, 아니 그 이전 분가 후 십 여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뻔질나게' 와주지 않았던 손녀를, 할아버지는 용서하셨을까? 만약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어렸을 적 내가 시장 가는 할머니를 따라가겠다고 떼쓰거나 사촌들과 난을 깨먹으면 할아버지는 효자손을 들고 무서운 흉내를 내셨었다. 이 호랑이가 물어갈 놈- 소리 지르고 어린 몸뚱이를 면이불로 둘둘 싸버리시면서. 이번에도 그렇게 하실까? 아님 마지막 뵈었을 때처럼 조용히, 햇볕 나리는 거실만 내다보다 불퉁하게 웃어버리실까.


언젠가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면, 꼭 말하고 싶다. 호랑이 운운하며 효자손을 들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과자 쥐어주시던 당신을 이제 스물 여덟살 먹은 손녀는 계속 기억하고 있다고. 생전 티 안 내시다 시골 친척들만 오면 '우리 베짱이가 책도 많이 읽고 똑똑해, 개구리말(영어)도 아주 잘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던 걸 가끔 떠올린다고. 나른한 주말 티비 영화 채널을 들척일 때면 어릴 적 하던대로 당신의 둥근 배를 베고 007시리즈를 보고 싶어진다고. 그리고. 당신의 꾸밈없는 애정 덕에 나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이따금 내가 못났다고, 부족하다고 말하는 세상을 마주해야 했을 때도 날 아끼던 당신을 떠올리며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고.


보고 싶다, 우리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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