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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으로 가릴 수 있는 것

생라면

by 베짱이J


봉지를 뜯지 않은 채 부순다. 쪼개고 튕기고 찧는다. 손끝에서 들려오는 느낌이 사부작거릴 무렵 가위로 봉지 한끝을 예쁘게 잘라낸다. 후레이크는 제쳐두고 분말스프를 뜯어 몽땅 봉지 안에 쏟아붓는다. 다시 봉지 끝을 틀어쥐고서 거세게 흔든다. 붉은 스프가 튀긴 면들 사이로 알알이 스밀 때까지, 아리아드네의 실이라도 없이는 도저히 제 길을 도로 찾아 나오지 못하게끔.


스프가 고루 묻은 라면조각을 씹으면 이젠 자극적인 감각이 미뢰 깊숙이 침투한다. 특별히 많이 묻은 조각을 삼키면 스프가루가 위벽에 녹아 들러붙는 게 느껴진다. 나트륨이 급속히 흡수되는 순간 머리가 핑 돌고 어지럽다. 목과 식도와 위가 활활 불타오르는 느낌, 머리가 쪼개질 듯 아픈 느낌. 좋다. 좋다. 나는 숟가락을 들어 은박지 위에 묻은 스프가루까지 긁어먹는다. 한 톨도 남김없이, 오롯이 내 점막에 들러붙을 수 있도록.



2020-07-03-15-08-45-555.jpg 부숴 먹는 생라면은 신라면이 진리다






취업준비를 할 때 스트레스를 받으면 무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운동이나 피아노 연주를 한다고 답했다. 무난하고 의심 사지 않을만한, 사뭇 건강하며 교양있어 보이기까지 한 대답이다. 그러나 실제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는 라면을 부숴 먹었다. 부숴 먹다 부족하면 두 세 개씩도 뜯었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져 온 오랜 습관이었다.


스트레스 해소법도 배우지 못한 채 스트레스에 찌든 중학생은 한 번씩 속에서 솟구치는 화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부모님은 사는 게 바빠 노는 법을 가르칠 줄 몰랐고 무엇보다 감정 내색하는 걸 하수로 여겼다. 청소년기 호르몬에 잠식당하며 화가 많아진 난 감정을 죽일 때마다 나 자신도 함께 죽이는 기분이었다. 산처럼 쌓인 학원 숙제를 하는 밤마다, 나를 붙잡고 네가 공부를 잘해야 아빠가 조금이라도 숨 쉬고 살만해질 거라는 엄마의 단도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팍이 답답해졌다. 누군가의 관심과 기대를 받는 게 싫었다. 어차피 인생은 독고다이, 나의 레코드는 온전히 나만의 레코드이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럴 수 없었다.


하필 내게 사춘기가 찾아왔을 무렵 아빠 커리어 상 최대 위기도 함께 왔다. 본사 재무기획부에서 승진가도만 달리던 아빠는 잘나가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검사부에 배치됐다. 사내 직원을 감찰하는 부서이니 향후 어떤 자리를 가더라도 도움될 만한 부서였는데, 우연히도 부서장이 사촌 큰아빠과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빠와 같은 회사의 노조 간부였던 큰아빠는 좋고 싫음이 분명한 성격이라 사방에 적이 많았다. 그리고 아빠가 그의 사촌동생임이 알려졌을 때부터 밑도 끝도 없는 갈굼이 시작됐다.


회사에서 문제란 대개 ‘문제삼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부서장은 아빠의 업무를 두고 사사건건 딴지를 걸었다. 별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것이어도 준비가 미흡하다고 힐난했다. 그러다 마침내는 업무를 주지 않았다. 십 년 가까이 지나서야 아빠는 내게 고백했다. 육 개월간 아무 일도 주어지지 않아 빈 책상 앞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고. 동료들이 야근까지 할 만큼 바쁘게 일하는 열띤 사무실에서 하릴없이 사내 인트라넷을 켜두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고. 아빠는 거기까지만 말했지만 이제 조금이나마 직장생활을 해본 나는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직감한다. 얼마나 비참하고, 슬프고, 또 모멸감 느낄 일인지.


그 때의 나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빠가 가족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기에 그저 불안한 공기만 감지할 뿐 그 이상을 알 수 없었다. 그걸 모른 채 매일 아침 엄마의 채근에 채였다. 베짱아, 네가 잘해야 돼. 너 공부 잘하는 거 하나만 보고 아빠가 버티고 있어. 운 좋게 전교 1등을 한 후로 엄마의 채근은 나날이 깊어지고 집요해졌다. 성적이 잘 나올 때마다 사무실에 있을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전엔 별 생각 없이 받던 상장이나 성적표도 냉장고에 보란듯이 붙여뒀다. 수행평가 점수가 1점이라도 깎이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매일 술에 취한 채 들어오는 아빠가 생각났다. 회사에서 힘들 때마다 우리 딸이 전교 1등이야, 라는 별 것 아닌 사실에 부지해 자존감을 지킨다는 그의 주사가 생각났다. 숨이 막혔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밤마다 남몰래 생라면을 꺼내왔다. 원래도 짠맛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당시의 생라면은 좋아하는 맛을 먹기 위함이 아니었다. 스프 하나로 부족해 두 개도 뿌렸다. 자주 먹을수록 매운 맛에 익숙해져 부순 라면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엄마 몰래 엄마가 부엌 찬장에 넣어둔 라면 스프-사리만 쓸 일이 있을 때 남은 것들-를 꺼내왔다. 밥그릇에 스프를 붓고 물을 자박하게 넣어 개어 먹었다. 속이 아플수록 좋았다.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울수록 좋았다. 몸이 아프면 속의 답답증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때 나는 알았지, 고통이란 가장 강한 놈이 독점한다는 것을. 두 번째부터의 고통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 사람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를 다 뽑아내고 난 뒤에야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생니를 뽑아내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온몸을 바쳐서 사랑했던 여자가 떠나간 뒤에 내게 남은 고통이 그토록 컸기 때문에. 그러니 치과의 계단을 다 내려온 내가 마침내 스스로 내 목을 찌르게 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빠가 부서이동을 하고 다시 안정적인 직장생활에 접어든 후에도 나는 재수를 하고, 조모임 팀원에게 뒤통수 맞고, 퇴사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차이는 모든 순간마다 생라면을 부쉈다. 아주 자근자근 꼼꼼하게 부순 뒤 스프를 털어넣고 씹어먹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마음이 덜 아프기 위해 생니를 뽑듯 나는 내 식도와 위를 학대했다. 고통의 해소란 그저 다른 더 크고 직접적인 고통으로 덮어버리는 것뿐이라고, 온몸으로 배우는 밤들이었다.


이런 방식이 오래도록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걸, 이러다간 마흔쯤 됐을 때 내 장기는 완전히 탈이 나 작동을 멈출지 모른다는 걸 안다. 취업준비 때 태연하게 답하던 것처럼 운동이나 악기 연주 따위로 방향을 트는 편이 나의 신상에 이로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멈추지 못하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이토록 하릴없는 글을 뜬금없이 쓰는 것 또한 요근래 생라면을 부숴먹는 빈도가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세 번, 이번주에 두 번. 아무래도 나는 요절할 것 같다고, 죽기 전에 가능한 한 지킬 것은 만들지 말고 이렇게 하릴없는 글이나 더 많이 생산해둬야겠다고, 오늘밤 또다시 생라면을 씹으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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