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국과 마츠코
얼마 전 은평구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평일 점심, 하늘이 눈부시게 파란 대낮이었다. 이게 가능했던 건 한 명은 출근이 늦는 간호사, 한 명은 시험준비생, 한 명은 백수(나)였기 때문이다.
은평 소재 대형 병원에 근무하는 친구는 멀리까지 와주어 고맙다며 그 일대에서 가장 맛있다는 해장국집에 데려갔다. 여자끼리 만날 땐 해장국이나 순대국 따위를 먹는 일이 잘 없어서인지 친구는 괜히 미안해했는데, 정작 해장국은 그의 사과가 무색하리만큼 맛있었다. "여기 병원 사람들 자주 와." 친구가 눈치 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퇴근길에 소주 한 잔이랑 먹으면 진짜 딱 살 것 같아." 소고기와 내장, 선지가 뚝배기 넘치도록 든 해장국은 오래 공들여 끓인 게 분명하도록 맛깔났다. 씹을수록 고소한 그것을 우리는 돔베고기까지 곁들여 양껏 먹었다. 좋은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먹어 행복했다.
좋은 친구들, 특히 인연이 긴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때로 상대가 나보다도 날 더 많이 안다는 걸 깨닫는다. 식사 후 은평한옥마을의 카페에서 오후를 함께했던 시험준비생 친구는 사실 나와 비슷한 시점에 취직해 비슷한 시점에 그만둔 아이이다. 시작이 비슷했던 만큼 서로의 회사생활을 자주 공유했었는데, 그 날 커피를 마시며 내가 예전에 했다는 말들을 다시 들려줬다. 놀랐다. 나는 기억도 못하는 말들이, 생각들이, 더러는 지금 다시 적어둬야겠다 싶을 만큼 그럴듯한 아이디어들이 친구 안에 오롯이 저장돼 있었다. 그 날 내가 들은 것은 내가 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서사가 아닌 그 친구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나의 서사였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고 느끼고 해석한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 고마웠다. 때로 가량맞게 느껴질만큼 부실한 나 자신의 서사보다도 더 곱고 충실한 서사를 써준 친구에게 감사했다. 더불어 기실 나보다 더 치열하게, 자신의 인생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그 친구의 서사가 내 곁에 있어 영광이었다.
내 서사를 가량맞게 만든 결정적 기간-회사-이 끝날 즈음에 내가 몇 번이고 다시 보던 영화가 하나 있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작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다. 이 영화를 자꾸자꾸 본 데에는 기본적으로 이런 일견 병맛 명작이 취향이어서도 있지만(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이니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아시리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그 수준을 넘어 거의 맨날 울면서 봤다. 마츠코는 밝은 옷을 입고 살랑살랑 춤추는데 나는 계속 눈물이 났다. 가엾어서, 그리고 저토록 나와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던 인생이 얼마나 연약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아서, 사실 내가 그런 마음이어서, 보고 보고 또 봤다.
어떤 인생이 좋고 나쁜가는 함부로 말할 수 없으나, 최소한 당사자의 행복을 놓고 봤을 때 마츠코의 인생은 자꾸만 더 수렁으로 빠져드는 쪽이었다. 왜였을까. 영화를 네 차례 넘게 돌려보며 나는 매번 그걸 고민했다. 학교 선생을 하며 좋은 남자와 결혼해 엄마가 되었다면 누구보다 따뜻하고 행복한 사람이 됐을 법한 스타일인데 대체 어디서 삐끗했던 걸까. 영화를 돌려보며 추스른 대목은 두 부분이었다. 첫 번째는 학교에서 잘린 후 집을 나간 것. 두 번째는 야쿠자 남자와의 교제를 말리는 친구 사와무라 메구미를 끊어낸 것.
예상치 못한 순간에 수렁에 빠지는 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순간 사람은 대개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된다. 박살난 조각들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조금이라도 말짱한 공산품처럼 보이려 애쓰는, 그러나 실은 속 안의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고칠 엄두조차 못 내는 존재. 그 때 중요해지는 게 바로 사람이다. 궁극적으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삶일지라도 주변에 얼마나 좋은 사람들-조건 없이 애정을 베풀고 염려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에 따라 이후의 선택과 행복이 바뀔지니. 헌데 마츠코는 그걸 버렸다. 자신을 가장 아껴줄 사람들을 버리고 성숙지 못한 애정만 줄 사람들에게 가버렸다. 사람을 골라야 하는 순간마다 고르지 말아야 할 사람을 골랐다.
은평한옥마을에서 커피를 마시며 나는 마츠코를 볼 때의 생각을 되새김질했다. 퇴사 후 한동안 회사 근처 자취방을 빼지 않고 있다가 본가로 들어가야겠다고 결정한 것은 사실 마츠코 때문이었다. 뭐 하고 사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약간 무안해하면서도 끊임없이 친구들을 만나고 스터디들을 만든 것 또한 마츠코 때문이었다. 당장 내 마음이 편해지는, 쉽고 값싼 애정들만 택하다보면 마츠코처럼 될까봐 무서웠다. 얼마간 마음 불편하더라도 내게 진심으로 '오카에리'-마츠코가 그토록 듣고 싶어하던-라 말해줄 수 있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었다. 다행히 스물 일곱 해 남짓한 인생이 헛되진 않았는지 주변엔 가족을 비롯해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를 하나도 안 다독여주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만으로 나를 일깨우는 이들이 있었다. 간호사 친구도, 지금은 다시 시험공부를 하는 친구도 그런 사람이었다. 아득했던 심연을 건너온 것은 모두 그들 덕택이다.
아직도 내겐 확연한 미래와 길이 서지 않았고, 매일매일이 얼마간의 불안을 품고 지나간다. 그러나 건방지게도 마츠코처럼은 안 되겠지, 믿음을 가져보는 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다. 그를 통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스스로를 확인하면서다. 괜찮지 않을까. 나와 해장국을 먹어주고, 사는 얘기를 하고, 무엇보다 충실히 살려 애쓰는 자신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어 나는 아무렴 괜찮지 않을까. 그 날, 북한산 자락에서 조용히 혼자 믿어봤다.
*영화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