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살 되던 해 12월, 재수를 결심했다. 사실 결심이라기엔 거창하고 친구가 같이 하자고 꼬셔서 했다. '재수하려면 학원부터 알아봐야지', 순진한 예비 재수생은 강남에서 유명하다는 재수학원 중 하나에 가 상담받기로 했다. 부모님껜 예약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상담받다 보니 좀 심사가 꼬였다. 상담해주던 선생님은 시종일관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는데, 학원의 일 년 스케줄을 간략히 설명해주고선 팔짱을 끼고 날 내려다봤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며 어차피 학생 아니어도 들어오려는 애들이 많으니 자리 놓치기 싫으면 서두르라 했다. 그런 태도가 부모 없이 달랑 온 학생에 대한 은근한 무시였는지, 매출 증진을 위한 고도의 마케팅 전술이었는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재수가 없었고, 나는 헤헤 웃으며 엄마와 상의해보겠다 말한 뒤 집에 와 독학재수를 선언했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일 년이 시작됐다.
독학재수를 했다 하면 사람들은 대개 대단하다거나 신기하다고 말한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붙잡아주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스스로 스케줄을 관리하며 공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며.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나 그거 딱히 잘하진 못했다. 4월인가엔 패턴이 완전히 무너져 아침부터 밤까지 컴퓨터만 하기도 했다. 게다가 독재를 하며 깨달은 것은, 생각보다 스케줄이나 공부량 관리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더 큰 복병은 '외로움', 그리고 그와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 '불안'이었다.
12년 동안 항상 새 시작을 하는 달이던 3월, 나는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소속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어떤 학교도, 조직도, 출석번호도 나를 설명하는 소속 내지 표지로써 기능하지 못했다. 나의 존재를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은 결국 나를 알고 있는,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뿐인데 그런 일상의 타인이 없는 나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나 하나가 오롯이 빠져나갔는데도 세상은 아무 문제없이 돌아가더라. 나 자신조차도 낯설었다. 이룬 거라곤 고등학교 졸업이 다인, 가진 거라곤 가능성뿐인데 그 가능성조차 불확실한 스무 살짜리 여자애가 대뜸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모든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여름까지는 오기로 버텼다. 자기 연민에 빠지는 건 싫었으니까. 지금의 닉네임이기도 한 베짱이는 급박한 상황에도 베짱이처럼 배짱부린다고 아빠가 지어준 별명이었는데, 차라리 그렇게 얼굴 가죽 두둑하고 강심장인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괜찮다고, 아무것도 겁나지 않는다고, 내가 좋은 대학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갈 수 있겠느냐고 끊임없이 호언했다. 내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당시의 나는 밥을 하루에 한 끼만 먹는 일이 잦았다. 일단은 독서실 밖에 나가 식당까지 찾아가는 게 귀찮았고, 그때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람들 속에 섞여 밥 먹는 게 고통스러워서였다. 마치 투명인간이 갑자기 투명화를 풀고 그다지 변변찮은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기분? 초콜릿이나 과자 따위로 때우는 경우도 많았고 우유와 크림이 듬뿍 들어간 커피 따위를 대신 사 마시기도 했다. 때문에 한 번씩 식사할 땐 오히려 까다롭게 메뉴를 골랐는데, 고열량이면서도 맛있는 메뉴가 목표였다. 그마저도 생활 반경이 한정적인 재수생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러던 중 구세주와 같은 식당을 알게 됐다. 일식 프랜차이즈인 미소야였다. 미소야가 좋았던 이유는 메뉴가 다양하고 맛있어서도 있지만, 무엇보다 배달이 가능해서였다. 그때 나는 수학을 봐주던 선생님 사무실에 가 공부하는 날도 많았는데, 거기서 공부할 때면 꼭 미소야에서 식사를 시켰다. 돈까스와 밥, 미소국과 반찬들까지 깔끔하고도 푸짐하게 배달된 식사를 먹으면 한 끼만 먹어도 배고프지 않았다. 로스카츠, 히레카츠, 생선 카츠, 그리고 특히 돈카츠 김치나베우동을 물리도록 시켜먹었다.
헌데 어느 날인가, 여느 때처럼 돈카츠 김치나베우동을 시킨 날이었다. 수학 선생님은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익숙하게 결제를 하고 배달 온 음식들을 책상 위에 늘어놓는데 어쩐지 마음이 공허해졌다. 당시의 돈카츠 김치나베우동은 만 원 내외. 새삼 내가 이만한 밥값을 하는 인간인지 의문스러워졌다. 기대하며 늘어놓은 하얀 배달음식 통들이 눈에 설었다. 국물을 삼키는데 갑자기 목이 막혔다. 참아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내가 돈카츠를 먹는 것인지 울음을 먹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갔다. 목구멍으로 의도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꾸역꾸역 쑤셔 들어오는 것 같았다. 결국 수저와 젓가락을 내려놓고 티슈 한 곽을 혼자 다 썼다.
나, 너무 무섭구나. 그 날에서야 인정했다. 이렇게 평생 혼자 앉아 배달 온 돈카츠 김치나베나 먹는 사람이 될까 봐, 어느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하고 이룬 것 하나 없는 사람으로 남을까 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뿌연 안개에 가려진 미래가 공포스러울 정도로 두려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불확실하고 고통스러운 날들을 견디는 마음은 숨을 꾹 참는 마음과 비슷했다. 수많은 것들-외롭고, 불안하고, 살아가기엔 너무 많은 나날이 남아 도리어 눈앞이 깜깜해지는-의 날카로운 단면이 마음 위를 스쳐 지나가는데도 그 모든 것들을 오롯이 느껴내며 숨을 꾹 참는 거였다. 산소가 공급되지 않은 혈류가 점차 느려지는 가운데 수시로 변화하는 마음을 견디고, 양극단을 달리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무시하려 애쓰는 거였다. 속에선 감정들이 폭죽처럼 터지는데 바깥으론 수도승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게 불확실함을 견디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 나는 자꾸 울었다. 그 해 말, 마침내 대학 입학허가서를 받기 전까지, 그렇게 나의 가치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괴물과 같은 감정들을 견디고 또 견뎠다.
새삼스레 재수 때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물론 얼마 전 오랜만에 미소야를 먹어서도 있다). 이때의 기억은 오래도록 강렬했음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인상이 흐릿해졌었는데, 최근 들어 느낀 묘한 기시감의 근원이 그 시절인 것을 최근 깨달았기 때문이다. 퇴사 8개월 차, 코로나 때문인지 유난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은 요즘, 재수 때와 같은 마음을 매일 관조 중이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뿐인, 그리고 확실한 한 가지는 내 앞의 놓인 모든 길들이 불확실하다는 것뿐인, 그런 상태를.
그런데도 기묘한 것은 최소한 지금의 나는 그때보단 그럭저럭 더 잘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보통 나는 내 마음을 잘 모르는 편이니 장담할 순 없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님 한 번 해본 짬밥이 있어서인지 모든 게 좀 더 수월하고 안락하다. 다만 요즘의 불확실함에는 '두 번째 선택은 잘못되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이 서려 있다는 게 차이인데, 이것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첫 직장 선택이 판단 미스였다는 자각, 자칫 연타를 허용할 경우 영영 일어서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재수 때와는 또 다른 결을 내게 안기고 있다. 잘할 수 있을까. 이겨낼 수 있을까. 이렇게 매일매일 불확실하게 지나가는 날들을 추스르고 갈아 넣어 고민하다 보면 무언가 조금이라도 확실한 길이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