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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J Sep 22. 2021

#1 꿈을 꿨어. 아주 이상한 꿈


“꿈을 꿨어. 아주 이상한 꿈.” 


미아가 말했다. 봄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우린 카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왜, 죽기라도 했어?”

“아니, 모르겠어.” 


미아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흘낏 붉게 상기된 그 애의 뺨을 훔쳐봤다. 하얗고 늘씬한 미아는 스푼을 흔드는 작은 행동만으로도 사람 마음을 흔드는 데가 있었다. 


너는 꿈을 너무 많이 꿔, 나는 핀잔을 주면서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미아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방송이 나오는 거야. 우리 아빠가 날 급하게 찾으니 얼른 집에 가보라고. 집에 도착하니 처음 보는 부모와 다섯 명이나 되는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어.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바로 알았지. 이 사람들은 내 가족이고, 아버지는 장교이고, 어머니는 약하다 못해 신경과민의 예민한 여자라는 걸. 


아버지는 우리가 어서 도망가야 한다고 했어. 적군이 쳐들어오고 있다고, 수도가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이니 피난민이 몰리기 전에 움직여야 한댔어. 그제야 꿈의 초반부터 느껴지던 불길한 기운이 뭔지 알았어. 가족들은 급하게 짐을 챙겼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자가용에, 어머니와 다른 동생들은 군용차에 탔어. 도시를 벗어날 때쯤 멀리서 폭탄소리가 들렸어. 


무서웠어. 꿈 속인데도 생생하게 무서웠어. 아버지는 도시 밖에 있는 부대에 찾아가는 거였어. 거기까지만 가면 안전할 거라고, 그 다음부터는 부대를 따라 이동하면 된다고 했어. 그 말을 듣자 교실에 남아있던 애들을 떠오르더라. 아버지는 모두에게 경고할 수 있었는데도 알리지 않았던 거야. 우리가 더 빨리 도망가기 위해서.


부대에 먼저 도착한 건 우리였어. 밤이었지. 군용차가 늦어지는데도 걱정하지 않았어. 군인들이 함께 타고 있으니 엄마와 동생들도 무사할 거라고, 그렇게 믿었어. 믿음이 바스라진 건 아버지가 사병의 보고를 듣고 흙빛이 되어 나갔을 때야. 부대는 이미 포위돼 있었어. 적군의 진격 속도는 예상보다도 빨라 수도는 물론 부대 주변까지 삼킨 거였어. 적군이 그만큼 가까이에 있다면 어머니와 동생들이 어떤 처지일지는 뻔했지. 그리고 그건 그들만의 일도 아니었어. 눈 깜짝할 사이에, 아버지와 나는 포로가 됐어. 


아버지가 장교라는 이유만으로 우린 곧바로 갇히지 않고 감시를 받았어. 언덕 위, 인근 지대가 다 내려다보이는 초소 기둥에 피가 나도록 손목이 묶인 채. 아랫광경이 훤히 들어왔어. 어두운 밤이지만 수십 개의 등불 덕에 주변은 밝았으니까. 사람들이 있었어. 삼 백명은 될 법한, 우리나라 사람들. 


나는 기적적으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발견했어. 가족들은 묶여 있었어. 갓난쟁이에 가까운 막냇동생만이 묶이지 않은 채, 그러나 이미 손이 묶여 안아주지도 못하는 어머니의 품에 매달려 있었어. 나는 한순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큰 소리로 그들을 부르려 했는데, 동시에 둘째 동생이 비명을 질렀어.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깨달았어. 


그들이 사람들을 묻고 있었어. 정말이야, 사람들을 묻고 있었어. 그냥 묻은 게 아니라, 커다란 독에, 장정 몇이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커다란 독에 손이 묶인 사람들을 어거지로 밀어넣고 독째로 묻고 있었어. 사람들이 울부짖었어. 그럼 그들은 삽으로 사람 머리를 으깨놓은 후 마저 밀어넣었어. 우리 가족들도 예외는 아니었어. 상황을 파악한 아버지가 가족들을 살려달라 빌었지만, 겨우 10대 후반이나 돼 보이는 사병들은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했어. 비웃더라. 달려나가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수록 밧줄이 손목을 파고들었어. 


둘째 동생이 도망가려다 붙잡혀 머리통을 걷어차이는 게 보였어. 그 애는 왼무릎이 반대 방향으로 꺾인 채 독에 묻혔어. 아직 너무 어린 다른 동생들도 독에 켜켜이 쌓였고, 실신한 어머니와 막내동생이 한데 욱여넣어졌어. 가족들이 숨 쉬지 못해 헐떡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어.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비장이 터지는 소리가.


거기서 난 봤어. 독 속의 얼굴들을. 다 같은 얼굴이었어. 내가 아는, 꿈속에서만이 아니라, 꿈밖에서도 아는 얼굴. 고개를 돌리자 감시병들의 얼굴도 보였어. 그들도 똑같은 얼굴이었어. 울부짖던 얼굴이, 이번엔 마구 히죽대고 있었어.     






“누구 얼굴이었어?” 답을 짐작하면서도 나는 물었다. 


미아가 나를 응시했다. 그 애는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투명하게 반사되는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냈다. 얇은 봄니트 사이로 손목 위 갈색 흉터자국이 보였다. 창밖으론 비가 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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