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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J Sep 22. 2021

#2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녀에겐 어머니가 없었다. 오래전부터. 여자는 잠옷 위로 드는 한기를 참으며 생각한다. 있었다면 지금 달랐을까.  시녀들이 물러간 후 혼자 남은 방은 너무 크고 화려해서, 여자는 두려워진다.     


꽃과 축포, 비단과 레이스로 가득했던 국혼이 끝났다. 귀족들은 뚱한 얼굴로 제 얼굴만한 모자끝을 매만졌고, 거리에선 아름다운 왕자비를 칭송했다. 칭송의 주인공인 그녀는 멀리서 계모와 양언니들을 봤다. 묘하게 긴장한 표정의 그들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여자는 알았다. 평소답지 않은 가족들의 모습 뒤에는 나지막한 협박이 있었으리라는 걸. 당신을 사랑하지만, 체면이란 게 있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고, 병사들을 보냈다. 이제 계모와 언니들은 왕자비의 가족으로서 넉넉한 생활비와 영지를 하사받을 것이다. 이전엔 꿈도 못 꾼 중앙 사교계에도 진출하리라. 대신 죽을 때까지 비밀을 지켜야 했다. 요정의 은혜를 입었다는 어여쁜 왕자비가, 실은 시골 하급 귀족의 성에서 잿먼지를 뒤집어쓴 채 부엌데기로 컸다는 사실을. 버진로드를 걸어갈 때, 여자는 습관처럼 계모의 시선을 피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난다. 정교하게 조각된 문이 열리며 그가 나타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온 그여자의 베일을 걷힌다. 밤공기와 술냄새가 뒤섞인 숨결이 훅 다가온다.     


“마실래?”     


그가 쥐어준 술잔 위로 연갈빛 액체가 찰랑인다. 여자는 입에 대는 척하다 슬며시 내려놓는다. 그는 눈치조차 못 챈다. “걱정하지 마.” 여자의 머리칼과, 목, 어깨에 뜨거운 입술이 닿는다. “무서운 거 알아. 안 아프게 할게.”

     

여자는 눈을 감는다. 나무에 물이 오르는 봄마다 마당의 개들은 저들끼리 흘레붙다. 수컷이 암컷 위에 올라타 낑낑거리면 언니들은 깔깔거리며 돌을 던졌다. 간혹 일손을 도우러 왔던 젊은 농부는 삯을 받으러 계모의 응접실에 들어갔다가 다른 식으로 계산을 마쳤다. 그맘때 계모는 늦여름 복숭아처럼 한껏 무르익어서 손가락 하나만 대어도 터질 듯 달아있었다. 기억해둬라. 한 번도 여자를 아낀 적 없던 계모가, 왕궁으로 떠나오기 전날 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가랑이 사이로는 남자를 오래 붙잡아두지 못해. 계모의 등 뒤로 벽난로 불이 일렁였다. 여자는 지난날을, 밤이 이슥해지도록 계모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 사내들을 위해 복도에 등불을 남겨두던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무서울 건 없었다.


눈을 떴을 때 그가 여자를 침대에 뉘이고 있다. 가느다란 쇄골과 젖둔덕 위로 익숙치 않은 온기가 닿는다. “사랑해.” 거칠어진 숨소리와 함께 그가 말한다. 여자는 그의 갈색 눈을 보며 어떤 얼굴을 떠올린다. 여름날 저녁, 담쟁이덩굴 아래. 풀벌레 소리와 벌꿀향이 온몸을 적시는 가운데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비슷한 말을 하던 다른 얼굴을.


그래, 붙잡지 못하. 아랫배 어디선가 미약한 진동이 느껴진다.      


순수하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모른다. 사랑한다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그저 눈앞의 남자를 응시하고, 그가 원하는 바로 그 소리와 몸짓을 완벽히 수행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마녀처럼 속으로 중얼거린다. 달수를 채우지 못한 아이가 태어나리라. 아들일지 딸일지 모를 아이는 그럼에도 놀라울만큼 건강할 것이다. 여자는 아기를 사랑하겠으나, 온전히 품진 못할 것이다.


위를 올려다본다. 깊고 우묵한 천장이, 눈을 꿈뻑이며 그녀를 마주본다.           



#신데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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