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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J Dec 05. 2021

#3 하늘에서 내리는 티끌과 푸른 물감


여자는 서른이다. 그 사실을 앞에 놓인 커피잔을 보고 새삼 깨닫는다. 십 년 전 이맘때 그녀는 인생 첫 데이트에서 카라멜 마키아또를 마시고 배탈이 났다. 너무 달았나봐, 부끄러워 죽고 싶은 마음으로 여자는 전남친에게 말했다. 자꾸 화장실 가서 미안해.      


오늘 그녀는 다른 남자와 앉아 또다시 카라멜 마키아또를 마신다. 숱한 알콜과 당분에 길들여진 위장은 이제 185칼로리짜리 음료 따위에 뒤집어지지 않는다. 덕분에 그녀는 침착하다. 나이 먹으며 배운 건 부끄러워하거나 슬퍼한다고 돌아봐주는 이 없다는 것이니, 다행일지 모른다.


 ― 날 좋아하는 줄 알았어.      


여자의 말에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호감과 비호감을 구분한다면 호감이 맞지. 여자는 조용히 그가 말하고 싶은 만큼 말하도록 내버려둔다. 에두르고 무르는 말에 희망을 품진 않는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시간을 건넜으니까. 결론을 내지 않는 남자의 말은 하나로 귀결된다. 너랑 자긴 했지만, 널 좋아하진 않아.      


여자의 유일한 의문은 그저 이것이다. 어쩌면 이토록 자신이 짐짝처럼 취급될 수 있을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소중하지 않은 것처럼. 팔 년을 만났던 첫 남자친구, 십 분에 한 번씩 화장실에 들락거리던 그녀에게 비웃음 대신 물을 건넸던 남자친구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소중하다고 했다. 우린 비록 우주띠끌같은 존재지만 나란 티끌 옆에 네가 있어 다행이라고, 그 사실이 고맙다고. 그와 헤어지고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여자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남자들은 그녀에게 쉽게 호감을 품었지만 그만큼 빨리 식었다. 쑥스러워 말을 더듬던 사람들이 귀찮아하며 거리를 뒀다.


아무래도 내가 문제인가봐, 울어야 하는 날이 올 때마다 여자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가 알고 보면 별로인 사람이라서, 노잼이라, 곁에 오래 두고 싶진 않은가봐.     


 ― 미안해. 내가 개새끼네.      


남자가 멋쩍게 웃는다. 문득 어린 시절 미술학원에서 본 광경이 떠오른다. 물통에 물을 받아두고 처음 붓을 씻으면 푸른 물감이 실처럼 번졌다. 지금처럼. 흉곽 위로 무언가가 실처럼 번진다. 어릴 때와 달리 물감은 더이상 눈두덩이로까지 올라오지 못하지만 통증만은 생생하다.      


 ― 그래, 맞아.     


 여자가 웃는다.     


 ― 오늘 복날이야. 나 개새끼 잡으러 나왔거든.     


다음으로 해야 할 말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안다. 마음을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니 당신의 뜻을 존중한다고, 그래도 내게 한 짓은 너무했다고,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란다고. 여자는 우아하게 끝내고 싶다. 울며불며 저녁 시간을 망치는 짓 따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남은 마키아또와 함께 삼켜버린다.      


나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람이었어. 너에겐 이토록 별것 아닌, 잠깐 스치고 말 인연이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적도 있었어. 사람 사람으로 잊는다던데, 네 덕분에 나는 상처를 상처로 잊겠구나.      


여자는 가방과 컵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작별인사는 짧다. 카페 밖에 나왔을 땐 눈이 내리고 있다. 티끌 같은 흰 눈을 잡아다. 다행히 역사는 한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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