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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J Dec 07. 2021

#4 계란에게 십 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남자는 서른셋이다. 삼 년 전 그는 동갑내기 베프와 내기를 했다. 서른 살을 기념하는 뜻에서 주말 내내 계란 한 판을 다 먹어보자고. 식성이 좋은 그는 일요일 오전이 가기도 전에 한 판을 해치웠다. , 십 년 후에 두고 보자. 친구 이를 갈며 말했다. 최소한 위는 내가 더 건강하겠지.     


갑자기 왜 그때가 떠오를까. 남자는 얼그레이 티백을 자맥질하며 의아해한다. 봄햇살이 들이치던 주말, 혀가 데일 듯 뜨겁던 계란과 산처럼 쌓인 껍질의 풍광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남자는 티백을 내려놓고 눈앞의 여자에게 말한다.

      

― 호감과 비호감을 구분한다면, 호감이 맞지.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안다.  동호회에서 만났다. 뒤풀이 자리에서 그녀는 예뻤고, 색다른 방식으로 와인잔을 쥐었다. 남들이랑 똑같이 드는 건 재미없잖아. 그의 베프는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요상하게 쥐고 싶어. 그래서 그는 여자를 만났다. 서너 번 밥을 먹고, 두 번 영화를 보고, 한 번 잤다. 이제는 그만 보려 한다.

     

남자는 설명하려 애쓴다. 진흙투성이 강가에서 그나마 예쁜 자갈을 고르는 심정으로 단어를 고른다. 그러나 어떤 문장을 말해도 여자의 얼굴 그늘이 진다. , 그거밖에 안 돼? 아무도 말하지 않았는데 남자의 귓가엔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그만하자고, 할 만큼 했다고, 체념하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린다. 목소리는 주말 내내 함께 계란을 먹던 베프. 그녀의 목소리다.

    

 년 전 그녀를 놓쳤을 때 그는 울었나. 아마도. 남자의 베프이자 전여친이던 사람은 연애 초에 이렇게 말했다. 너의 모든 과거가 좋다고. 네가 겪은 모든 것이 너 자체니까, 나는 네가 겪은 나쁜 일까지도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내가 겪은 모든 과거가 곧 나라면, 너를 잃은 경험을 한 나를, 난 결코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아. 지금 마주한 여자와 몇 차례 보는 동안 남자는 기대했다. 너를 지울 수 있을지 몰라. 새로운 여자가 자신의 농담에 웃고, 밤에 술 취해 전화했을 때조차 반기는 걸 알았을 때 마음에 훈풍이 돌았다. 너만큼 좋은 사람이 생길지 몰라.


여자와 보내던 밤 알아버렸다. 사소한 말이, 몸짓이, 말하고 있었다. 네가 아니야. 네가 아니야. 네가 아니야.      


― 미안해, 내가 개새끼네.     


남자는 웃는다. 부적절한 웃음인 걸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어 웃는다. 조용히 듣던 여자는 무어라 얘기하고, 그는 그 중 절반을 흘려듣는다. 마음이 저미지 않아 도리어 상처받는다. 이렇게까지 생채기 냈는데도 안아주고 싶지 않아 울고 싶어진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남자는 습관처럼 창밖을 본다. 싸락눈이 내리고 있다.    

 

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오늘을 돌아봤을 때, 무엇이 남을까. 남자는 의자 깊이 몸을 묻는다. 최소한 지금 느끼는 유일한 감정은, 피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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