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베짱이J Dec 10. 2021

#5 안부 묻는 날


그 날은 목요일이다. 대학원생인 윤은 여느 아침처럼 커피를 내리고 빨래를 돌린다. 강의가 한 시이니 발제를 마지막으로 확인할 시간은 충분다. 세탁기 알람소리가 났을 때 그녀는 옷걸이를 찾는다. 흰색 철사 옷걸이 하나가 휘어져 있다.    

  

너 이게 뭐야? 옷걸이 끝을 매만지는데 정의 모습이 떠오른다. 집에서 여기까지 이걸 달고 온 거야? 이 중학생일 때다. 약속에 나온 정의 체크무늬 코트 등쪽 벨트에 철사 옷걸이가 걸려 있었다. , 나 진짜 몰랐어. 걸을 때마다 대롱대롱 흔들리는 옷걸이를 보고 윤은 숨도 못 쉴 정도로 웃었다. 그만 좀 웃어. 정이 부끄러워했다.      


걔랑 친구 된 지 몇 년 됐더라. 윤은 옷걸이를 내려놓고 기억을 더듬는다. 중학교 일학년 임원 수련회에서 처음 만난 정은 하얗고 말간 얼굴에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나 너랑 친해지고 싶어. 너 착하고 재밌는 것 같아. 얼굴도 몇 번 안 본 주제에 정은 당당했다. 윤은 그게 좀 웃겼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기면 꼭 고백해야 직성이 풀리는 정의 성격도, 시험이 걱정되면 과목별 점수를 다 까며 전정긍긍해하는 점도,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진심이라는 게, 정공법이라는 게, 사람 사이에 얼마나 강력한지 아직 모를 때였다.

     

윤은 세탁기에서 꺼낸 수건들을 건조대에 하나씩 건다. 축축하게 널브러 수건에서 새물내가 난다. 정은 잘 지낼까. 윤이 삼수 끝에 겨우 원하던 대학에 붙었을 때, 그녀를 안아준 정의 옷에서 이런 새물내가 났다. 고생했어. 자기가 잘된 것도 아니면서 정은 울먹였다. 먼저 취직하고서 윤에게 취업턱을 낼 때도 그랬다. , 너 돈 벌 때까진 언니가 다 살게. 정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볼에 닿아 간지러웠다.      


수건 하나가 떨어진다.


“다 산다매.”


윤은 저도 모르게 말해본다.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제 목소리가 정상인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나 아직도 돈 못 벌어.”     


회사에서 따돌림을 당했대. 2년 전 가을, 정의 장례식에서 만난 동창이 속삭였다. 밤낮으로 죽으라고 카톡을 보냈대. 애를 회의실에 가두고, 일할 때도 왕따시키고... 윤은 그제서야 떠올렸다. 몇 주 전, 정이 갑자기 오늘 시간되냐며 연락한 적이 있었다. 윤은 시험기간이 코앞이었다. 좀만 기다려달라고, 끝나자마자 연락하겠다고 답하자 전화 너머로 배시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윤은 울 수 없었다. 눈이 붓고 머리가 헝클어진 정의 어머니를 보면서도 울 수 없었다. 식장을 나서기 전 정의 오빠가 윤을 붙잡았다. 동생한테 편지 하나만 써줄래요? 화장할 때 같이 태우려 해요. 윤은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정의 부고를 알렸고, 이전처럼 일상을 살았다. 납골당엔 가보지 않았다.    

 

윤은 커피가 다 식었다는 걸 깨닫는다. 머그잔의 삼분의 일 정도만 남은 커피는 향조차 다. 커피를 개수대에 버리고 포트에 물을 올린다. 손보려고 빼놓은 옷걸이를 본다. 어떻게 고쳐야 좋을까,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다. 주저앉는다.      


정아,

잘 지내니.      


뜨겁고 둥그런 무언가가 목구멍을 막는다. 윤은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몸을 옹송그린다. 어린애들이 숨바꼭질을 하듯이. 제 눈을 가리면 다른 사람도 못 볼 거라는 듯이. 잠깐이다. 아주 잠깐이다.      


윤은 안다. 자신의 댐이 아주 단단하고 견고하다는 걸. 남들은 한 번에 터뜨리는 보를, 자기는 그러지 못한다는 걸. 그녀는 매일 매일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고, 가야만 할 곳 다. 할 말을 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다. 그러다 이따금, 아주 잠깐, 가둬둔 댐 안에서 한 바가지의 물을 퍼낸다. 남들은 단시간에 퍼내는 물을 윤은 평생 퍼낸다. 철사 옷걸이를 볼 때, 체크무늬 코트를 볼 때, 팔짱을 낀 채 걸어가는 여자 아이들을 볼 때. 자리에 주저앉아 물어본다.     


정아,  

행복하니.      


잠깐이다. 아주 잠깐이다. 윤은 세수를 하고, 한 번 더 세수를 하고, 다시 커피를 내린다. 철사 옷걸이는 펜치로 고칠 생각이다. 그러면 멀쩡해보일 것이다. 거실 위로 햇살이 비친다. 말갛다.     



매거진의 이전글 #4 계란에게 십 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