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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폽 디몽 헌터스": 프랑스의 혼문도 건재하다

프랑스 학교를 점령한 케데헌의 인기

by 지은필

CM1 (만 9세) 학년으로 올라간 제인이는 개학 첫 주 내내 집에 오면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 얘기부터 꺼냈다.

"엄마, 학교에서 애들이 다 케이팝디몬헌터스 노래 불러"

"엄마, 근데 프랑스말로 불러"

"엄마, 근데 애들이 한국말 파트가 무슨 뜻이냐고 나한테 계속 물어봐"


세계 곳곳에서 케데헌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프랑스에서의 인기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난 한 주 동안 내가 직접 겪은 일만도 여럿이다.

하루는 이른 아침부터 윗집에서 "소다팝"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바캉스의 여독이 남아있는 개학 첫 주, 아이들을 깨우기 위한 엄마의 라이브였는지, 하루를 힘차게 시작해 보자는 아이들의 결의가 담긴 노랫소리였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이웃들을 깨우기에 충분할 정도의 성량과 흥이 담긴 "소다팝"이었다는 것.

지난주 목요일 아침에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길에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 있던 엄마가 "골든"을 부르고 있었다.

엄마는 과장된 몸짓과 큰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골든"의 고음구간을 부르고, 아이들은 행여 친구들이 볼까 두리번거리며 엄마한테 그만하라고 애원을 했다.


바캉스 전부터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들어보기는 했지만, 볼 생각까지는 없었다.

일단 프랑스집에는 넷플릭스가 없고, 그냥 잠깐 지나가는 유행이겠거니 싶었기 때문.

그런데 8월 말 가족들이 모였을 때, 우리가 케데헌을 안 봤다는 이야기를 들은 동생이 깜짝 놀라며 "요즘 애들 중에 케데헌 안 본 애가 어디 있어!" 하며 나를 나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학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동생은 이모의 권한으로 '케데헌 상영회'를 열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보기 시작한 나와 아이들은 영화가 끝날 때에는 몸이 반쯤 티브이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덕분에 바캉스의 끝자락에 첫째는 "골든"과 "How It's Done"의 가사를 익히느라 바빴고, 사자보이즈에 빙의된 둘째는 "소다팝"에 맞춰 요상한 춤을 췄다.


12주 연속 프랑스 넷플릭스 영화 1위 중인 케데헌

케데헌은 9월 둘째 주 현재 12주 연속 프랑스 넷플릭스 영화 랭킹 1위를 지키고 있다.

프랑스 미디어는 단순한 영화 리뷰와 평론을 넘어서 케데헌의 성공 요인부터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고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오늘 아침 올라온 한 라디오 뉴스의 기사 제목도 찰떡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넷플릭스와 학교 놀이터에서 거둔 막대한 성공" ("Kpop Demon Hunters": énorme succès sur Netflix et dans les cours de récré)

제인이 또래의 아이들을 인터뷰했는데, 한 아이는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운드트랙을 외워서 부르고, 케데헌을 네 번 봤다는 아이는 주인공의 옷과 머리가 예쁘고 노래도 정말 잘한다고 속사포로 이야기한다.

기자는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학교 놀이터에서 모여 케데헌에 나오는 노래와 춤을 따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옆에서 듣던 제인이도 거든다. "진짜야, 애들 진짜 이래."


케데헌 이전에도 전조 증상은 있었다.

작년에는 블랙핑크를 좋아하는 친구 몇 명이 제인이에게 너는 한국말을 해서 좋겠다며 늘 부러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본인 생일파티에서 블랙핑크 노래에 맞춰 친구들과 군무를 추는 걸 엄마가 찍어 채팅방에 올리기도 했다.

(정작 제인이는 블랙핑크 멤버가 몇 명인지도 모르고 노래 가사도 거의 못 알아들어서, 내가 따로 '나머지 공부'를 시켰다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케이팝은 마이너 문화라고 생각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대다수가 신화 팬클럽이었던 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나와 친구 하나는 이어폰을 나눠 끼고 김동률 노래를 들었었는데, (결은 완전히 다르지만) 그 정도의 영향력과 감성이겠거니 한 것이다.


그런데 케데헌은 분명히 다르다.

제인이 말에 의하면 학교에서 케데헌을 "안 본 애는 있어도 모르는 애는 없다"는 것.

단순히 영화에 대한 흥미를 넘어서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도 뜨거워진 듯하다.

친구들이 제인이에게 너네 집에 놀러 가도 되냐고 계속 물어본다길래 이유를 물으니 헌트릭스처럼 김밥과 라면이 먹어보고 싶어서란다.

영화에 나온 장소들이 정말로 한국에 있는 거냐고 묻는 친구도 있고, 제인이가 남산타워에 가보았다고 하니 다들 "트로 쿨! (trop cool! 진짜 짱이다!)"이라며 호응을 했다니 상상만으로도 귀엽다.

K-pop-Demon-Hunters-impact-kimbap-2.jpg 프랑스 어린이들의 로망이 된 케데헌 속의 라면과 김밥

개인적으로 케데헌에 감사하는 건 제인이의 한글공부에 동기부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제인이는 요즘 밤마다 내 침대로 와 휴대폰을 빌려 케데헌 노래 가사들을 공책에 적는 걸 좋아한다.

대량의 영어 가사 사이로 한국어 가사가 한 줄씩 나오면 나는 속으로 신이 난다.

다소 과격하고 활용도가 떨어지는 표현들이 있긴 하지만 (예를 들면 - '정신을 놓고, 널 짓밟고, 칼을 새겨놔', '갑자기 왜 그래 먼저 건드려 왜' 같은?) 한동한 뜸했던 한글 쓰기 연습에 도움이 된다.

친구들에게 가서 설명해 주어야 하니 내가 뜻을 풀이해 주는 것도 집중해서 잘 듣는다.

20250914_211805.jpg 첫째의 케데헌 노래 필사노트

십 년 전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인 이웃 한 명은 맥도날드는 "너무 미국 음식"이라며 가지 않았고, 식당에서 케첩을 부탁하니 우리는 그런 거 없다며 찌푸리던 식당 주인도 만나 보았다.

꼬레에서 왔다고 하면 "꼬레 뒤 쉬드 우 꼬레 뒤 노드? (남한 아니면 북한?)"이라는 질문이 당연한 수순이었고, '강남 스타일'과 '나 삼성폰 좋아해'까지 나오고 나면 이야기 밑천이 떨어졌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프랑스에서도 유효한가 보다.

익숙하고 풍요로운 자국문화를 벗어나 새로운 걸 시도하고 다양한 경험을 즐기는 세대가 도래했다.


케데헌의 열기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프랑스의 혼문도 건재해 보인다.

조만간 김밥 몇 줄 말고 평소에는 안 먹는 컵라면도 몇 개 사서 제인이와 친구들에게 파리의 루미, 조이, 미라가 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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