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부모, 교사가 함께 채워가는 손글씨 알림장
얼마 전, 한국에서 아이 둘을 키우는 친구와 우리 집 둘째의 만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니 개학한 지 일주일이 됐는데, 그동안 계속 필통을 안 가져갔다는 거야. 선생님이 알림장에 엄청 예쁜 글씨로 "마담, 엘리엇이 벌써 세 번 필통을 안 가져왔습니다. 좀 챙겨주세요" 써서 보내셨어. 진짜 완전 창피!"
"선생님이 손글씨로 알림장을 쓴다고?"
"응?" (여기서 왜 알림장이 나와?)
친구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요즘 알림장 앱이 있어서 애들도, 부모들도 다 휴대폰으로 숙제와 준비물을 확인한다고 한다.
급식 메뉴도 올라오고 아이들 활동 사진도 다 볼 수 있다니, 나에게는 흡사 SF 영화 속 장면처럼 느껴진다.
같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이곳 프랑스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곧장 전화기 대신 초록색 플라스틱 표지가 튼튼한 공책을 가방에서 꺼낸다.
보통 '까이에 베트(cahier vert)', '초록공책'이라고 부르는 'cahier de liaison (까이에 드 리에종: 연락공책)'이다.
프랑스 학교는 디지털 기기 도입에 매우 보수적이다.
특히 학교에서 학생들의 모든 전자기기 (휴대폰, 태블릿, 스마트워치 등) 사용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자연스레 모든 학습과 기록은 종이와 펜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까이에 드 리에종은 '편의와 효율성' 대신 '기다림과 정성'을 선택한 프랑스 학교의 철학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초등학교 첫 학년인 CP에 다니는 둘째의 초록 공책을 펼쳐보면 삐뚤빼뚤하게 붙인 종이가 가득하다.
선생님께서 공지사항과 숙제가 적힌 종이띠를 나누어 주시면 아이들은 열심히 풀칠을 해 붙인다.
덜렁덜렁 너덜너덜 붙어 있는 종이들에서 둘째의 성격이 묻어난다.
꼼꼼한 첫째는 단 한 번도 공책 밖으로 종이가 삐져나온 적이 없었는데, 둘째의 공책은 늘 '탈출한 정보'들로 가득하다.
그걸 찾느라 책가방 안에 머리를 박고 있는 아이를 보면 속이 부글부글.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않음을 안다.
학년말이 되면 선생님은 알림장에 오늘 적어야 할 내용을 칠판에 써주시고, 아이들은 하나하나 자신의 손글씨로 받아 적게 된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받는 것을 넘어서, 정보를 스스로 기록하고 책임지는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초록공책'에는 단순한 알림장 그 이상의 묘미가 있다.
바로 교사와 학부모가 소통하는 손글씨 채팅방이 되기 때문.
아이들 현장학습에 동행할 부모가 필요하다는 선생님의 공지에 답할 때도, 아이가 특별히 결석을 해야 할 때도, 클릭 몇 번 대신, 정중한 편지를 부친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늘 행하는 나만의 의식도 '초록공책'에서 이루어진다.
새 담임선생님께 감사와 지지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 이 기회를 빌어 저희 아이가 선생님 반에서 올해를 보내게 되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이가 선생님께서 독서와 스포츠를 강조하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두 가지 모두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활동이랍니다. 제인이가 이번 새 학년을 기대하고 있고, 학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부모로서 저희는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제인이의 학습이나 학교생활과 관련해 언제든지 나누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희는 아이가 선생님의 지도 아래 즐겁게 배우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소중한 아이들을 위해 늘 애써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곧 있을 학부모 모임에서 뵙기를 고대합니다!
올해 CM1에 올라간 아이의 담임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을 초록공책 위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바로 장문의 답장이 돌아왔다.
이렇게 따뜻한 메시지를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크게 감동받았고, 요즘 여러 비판을 받는 이 직업을 계속 이어가야겠다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엘제인은 정말로 사랑스러운 학생이고 매우 열정적이며 무엇보다 배우려는 의지가 강합니다. 모든 게 정말 잘 되고 있습니다 (...)
답장을 읽어 내려가며 코끝이 찡해왔다.
소명의식을 가진 교사는 얼마나 아름답고, 그런 선생님에게서 배우는 우리 아이는 또 얼마나 행운인지.
부모와 교사가 서로에게 손으로 직접 써서 보내는 메시지에는 앱의 채팅창으로는 느낄 수 없는 온도가 있다.
잉크의 번짐, 종이의 질감, 그리고 글씨체에서 느껴지는 상대방의 마음.
이 공책 안에서 교사와 학부모는 아이를 함께 키워가는 '동반자'로서 깊은 유대감을 쌓아간다.
디지털은 편리하지만 휘발적이다.
반면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기록은 시간이 흐를수록 발효된다.
아이와 부모, 교사가 1년 동안 채워나간 이 공책은 학기가 끝날 때쯤이면 성장 기록이자, 한 가정과 학교가 나눈 대화록이 된다.
속도가 미덕인 시대에 프랑스 교육이 여전히 종이 공책을 고집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교육의 본질은 지식의 전달 이전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심 어린 '연결'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아닐까.
아이는 오늘도 집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까이에 드 리에종을 꺼내 식탁 위에 휙 하고 던져놓는다.
거기에는 조금 더 자란 아이의 손글씨와, 우리 가족을 응원하는 선생님의 다정한 문장이 나란히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