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raZyEcoNomist Nov 30. 2021

그렇게 난 애널리스트가 되었다

여의도 새내기 애널리스트의 화려한? 데뷔

회사 면접을 볼 때만 해도 마스크를 전혀 쓰지 않았다.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반절 정도 되었나 보다. 3월접어들었고 학업과 병행이 시작되었구나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 코로나 위기로 주식 시장이 폭락했다. 한 국가의 대표 증시 지수가 5%씩이나 오르고 내렸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나중에는 미드 싱글 수준의 등락은 시시할 정도였다. 이런 시기에 나는 Ra로 리서치센터에서 일을 시작했다.


Ra는 research associate, research assistant의 줄임말이다. 애널리스트를 도와 보고서 작성을 위한 아이디어 구상 및 데이터 수집 등의 업무를 하며 동고동락한다. 도제제도와 유사한 체계라고 보면 된다. 수습생(apprentice)으로 실무를 주로 1년 반에서 많게는 3년까지 습득한다. 나는 운이 좋게도 2년이 지나지 않아 기회를 얻어 애널리스트로 승급할 수 있었다.


이전만큼의 정보의 비대칭성은 해소가 되었고 코로나 이후 주식 시장이 호황을 겪으면서 개인투자자의 주식 투자가 활발해졌다. 정보의 베타성이 약해졌고 여의도라는 경계가 다소 약해졌다. 애널리스트라는 직업의 업무 강도도 과거에 비해 약해졌지만 연봉도 상대적으로 줄었다. 절대적인 금액이 예전보다 늘지 않는다는 것은 해당 직무의 경쟁력이 약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닐까 싶다.


애널리스트라는 직업. 나도 고등학생 때는 너무 막연해 보였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읽는 짧은 발췌나 인터뷰가 다였고 애널리스트 보고서를 구경한 적도 없었다. 신기해 보였고 재밌어 보였다.


뉴스가 숫자로 변환되고, 세상이 돌아가는 흐름이 숫자의 흐름으로 보이는 금융시장이 너무 재밌어 보였다. 그때만 해도 차화정이라는 단어로 자동차와 정유화학이 잘 나갔고 STX가 과도하게 몸집을 불리다가 파산하기도 했다. PER이라는 것이 매매를 할 때 봐야 하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했고 삼성전자가 분할 전 70만 원 정도 했던 시기에 발을 들였다.


사회와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초등학생 때부터 아버지 옆에서 아침마다 오는 종이 신문을 들춰보곤 했다. 내가 재밌어하는 세상의 이야기는 intagible 해 보였는데  tangible 한 금융 시장의 숫자로 보이는 것이 신기했고 호기심이 많은 내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어제 시장의 뉴스를 아침 출근길에 훑어보면서 채권 금리와 원자재 가격을 살펴볼 때  이때의 설렘이 지금도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일이 재밌다는 점은 똑같다. 이것이 지금 내가 여의도에서 애널리스트를 할 수 있게 이끈 원동력이었다.


애널리스트라는 직업이 희소성이 있고 사람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고 전망과 생각을 피력해야 하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느껴진다. 여의도 애널리스트의 솔직한 이런저런 생각을 끄적여보도록 하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