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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기 Sep 28. 2016

여동생의 시골살이

다시 나와 가족들의 힘들었던 시절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나의 자매들을 위하여 글을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니까.




아버지가 짐을싸서 용달차를 불러 남동생만을 데리고 시골 할머니 댁으로 간 그날, 엄마는 하염없이 울다가 허탈한 표정으로 한참을 앉아 있었던 것이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남동생이 돌이 갓 지난 무렵으로 기억되고 난 초등학교 1학년 이었으며, 그날은 6월 6일 현충일이다.


난 어렸고, 엄마와 아빠는 별거하기 전에도 거의 매일 싸웠으며, 엄마와 아빠가 싸울때면 난 매일 울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내 여동생은 그때 시골에 있었다.




여동생은 서너살 밖에 안된 나이에 엄마와 떨어져 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지만, 우리 할머니는 자상한 분이 아니었다.

남동생은 연거푸 태어나는 5명의 딸 이후에 낳은 외동아들이었으므로, 여동생에 비해 대접을 받았고 여동생은 상대적으로 심한 푸대접을 받았다.

약간은 게으르기까지 한 연로하신 할머니는 귀찮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여동생에게 시켰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농사를 지으러 시골에 내려가셨지만, 사실 시골에는 아버지나 할머니의 땅은 한뼘도 없는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아버지가 열심히 농사를 지으셨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할머니와 동생둘, 네식구의 입에 풀칠하는 것이 버거울 지경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자식 둘을 학교에 보내면서 심지어 공책이나 연필, 색종이 등의 학교준비물조차 챙겨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으니 동생이 어떤 환경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는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당신의 인생이 괴로왔을 것이고, 그 분노나 화를 여동생에게 풀었던 것 같다. 가끔은 심한 매질까지 더하여...




부모님의 별거 후에도 나는 방학때마다 엄마를 따라, 또는 시골에 가는 친척이나 지인에게 맏겨져 시골에 내려갔고, 방학기간 내내 시골에서 지냈다.


시골에 내려가면 여동생은 오랜만에 만난 언니를 무척 반겼고, 시골에서 우리는 신나게, 정말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밤이되어 아버지가 사랑방에 군불을 넣어 주시고 이불을 깔아 잠자리를 마련해 주시면, 한 이불 속에 들어온 여동생은 내옆에 꼭 붙어서 나의 손을 꼭 붙잡고 잠을 청했다.


여동생은 가끔씩 표독스러운 성질을 드러낼 때도 있었는데, 양육 환경을 생각해 본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어렸던 나는 여동생이 못돼먹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내가 서울로 돌아올 때의 여동생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여동생은 울지는 않았지만 체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있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여동생은 내가 떠나고 난 후 혼자서 숨죽여 울었을지 모른다.


6학년 겨울방학을 마지막으로 난 시골에 내려가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때 아버지는 결국 시골생활조차 포기하고 엄마에게는 버거울 정도의 빚을 가지고 서울로 오셨고,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아버지가 미웠고, 까탈스러운 여동생이 짜증났으며,  남동생을 싸고도는 엄마가 야속했다. 나는 어렸으니까...


아버지는 그 이후로도 가족을 부양할 만큼 경제활동을 하지 못했고 암 투병까지 하게 되었다. 엄마와 언니들은 적지않은 비용을 아버지의 병원비로 부담했지만 아버지는 결국 세상과 이별하셨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끝내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했다.




내가 학업을 마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어른이 되었을때, 나는 옛일을 돌이켜 보며 종종 후회와 회한에 젖어들곤 했다.


그때는 어려서, 그리고 가난한 삶이 너무 힘들어서 나 아닌 타인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고 혼자서 변명을 해본다.


가난했지만 나는 엄마의 품에 있었고 3명의 언니들 틈에서 막내로 자랐는데, 여동생은 시골에서 얼마나 외롭고 엄마품이 그리웠을까.




이제 우리 남매들은 모두 제짝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삶의 의무와 책임을 짊어지고서 무심한 듯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어렸던 우리들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숨겨졌던 크고 작은 상처들은 가끔씩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난 아직도 이불속에서 꼭 잡았던 내 여동생의 손의 온기를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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