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를 운영하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
지난 주 금요일.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경복궁 감자집(舊 열정감자)이 문을 닫는 날이 찾아왔다. 2012년 10월 3일 개천절에 문을 열었던 경복궁 감자집은 4년이 조금 되지 않아 많은 추억을 뒤로 하고 작별 인사를 하게 되었다. 경복궁 철인28호(舊 꼬치집)가 문을 닫았을 때도 기분이 이상했지만 경복궁 감자집은 그 어떤 가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청년장사꾼의 대표 매장이었달까? 제일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제일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경복궁 감자집. 경복궁 감자집을 추억하며, 하나의 매장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1. 자본금
경복궁 감자집이 청년장사꾼의 1호점이라고 알고 있는 분들이 정말 많다. 사실 경복궁 감자집은 청년장사꾼의 2호점이며, 1호점은 이태원 우사단마을이 시작된 이슬람사원 앞에 오픈했던 ‘사원 앞 카페 벗’이다. 커다란 포부로 1호점을 열었지만 쉽지 않았다. 오픈 후 1주일이 지났을 때, 카페에 앉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많이 왔던 지인들의 방문이 끝나고 우리는 현실을 깨달았다. 전세 보증금을 빼서 투자했던 5천만 원이 고스란히 매몰비용이 된 후, 우리는 다음 매장을 낼지, 아니면 여기서 그만둘 지에 대해 결정하기로 했다. 아직 우리가 잘 하는 것도 보여주지 못한 채 이대로 사업을 접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했고, 개인대출 등 4천만 원을 다시 모아 2호점을 준비했다.
1호점 때도 그랬지만 제일 문제가 되었던 건 부족한 자본이었다. 저렴하면서도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상권은 많지 않았다. 그렇게 수소문을 하던 중, 아는 지인으로부터 전통시장 안에 넓지는 않지만 보증금과 월세가 굉장히 저렴한 자리를 소개받았고, 그 자리가 바로 경복궁 감자집의 자리였다. 당시 북촌은 어느 정도 인기를 누리고 있던 곳이었다. 북촌에 이어 사람들이 서촌으로까지 이동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소문 및 막연한 기대에 경복궁 금천교시장 길에 하루 종일 앉아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어떤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지 지켜봤다. 4평반에 월세 35만원. 안 되면 진짜 여기서 라꾸라꾸를 펴 놓고 잔다는 마음가짐으로 계약을 했고, 직접 공사를 시작했다.
2. 아이템
지금 ‘스몰비어’라는 단어는 아마 한 번쯤은 어딘가에서 들어봤을 법한 보편적인 용어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2012년, 그 당시 스몰비어라는 개념은 굉장히 생소했다. 감자튀김 하나로 승부를 본다는, 게다가 금천교 시장에는 없었던 맥주집.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도 100% 확신을 가지고 시작했던 아이템은 아니었다. 하지만 쟁쟁한 오래된 시장 골목 상권에서 우리가 어쭙잖게 맛으로 도전을 하는 것이 더 큰 무리수였다. 우리가 어렵지 않지만 맛있게 만들 수 있는 메뉴, 간단히 2차로 한 잔 더 먹기 좋은 간편한 맥주집을 상상하며 우리는 아이템을 정했다.
(아이템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다뤘던 브런치를 소개하며 넘어가고자 한다.)
경복궁 감자집의 첫 겨울, 그 땐 깔깔이도 유니폼이었다.
3. 우리가 잘 하는 방식의 마케팅
1호점은 잘 되지 않았지만 1호점을 하며 배웠던 것이 있다. ‘인사’에는 장사 없다는 사실이다. 감자집은 금천교 시장 골목 중에서도 초입이라기보다는 좀 깊숙한 곳에 위치했지만, 우리는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시장 상인 분들에게도 인사를 했고, 주변 직장인, 동네 주민, 감자를 사는 지 안 사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인사를 하고, 안부를 전하고, 하이파이브를 하며 우리를 조금씩 알려갔다.
감자집을 운영하며 아마 가장 많은 추억을 함께하는 건 배화친구들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처음 감자집을 오픈했을 때,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시장 골목 자체가 오래된 가게들이 많았고, 젊은 느낌을 찾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 골목 끝에 위치한 배화 여중, 여고, 여대생들은 하교를 하다가도 감자집 바로 옆에 있는 골목길로 큰길로 나가곤 했다. 이렇게 시장 자체에 젊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았었지만, 우리가 매장을 오픈하고 젊은 사람들이 씩씩하고 재미있게 장사한다는 소문이 퍼지며 젊은 친구들이 우리 매장 앞을 거쳐 시장 골목 끝까지 통행하게 되었다.
워낙 우리밖에 젊은 사람들이 없어서 동네 어르신들 연탄 굴뚝도 고쳐드리고, 폭설이 내렸을 때 골목 전체의 눈을 다 쓸기도 했고, 시장 상인회에서 주최하는 동네잔치에 지원해서 가서 도와드리기도 했다. 우리가 장사를 하는 상권이기에, 무작정 튀거나 달라 보이는 것이 아닌, 상권에 녹아들며 상인 분들과 함께하기 위한 노력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4.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이벤트
경복궁 감자집은 정말 많은 시도를 했던 곳이다. 그 중에 하나가 청년장사꾼다운 재미있는 이벤트였다. 평소에도 소소한 이벤트를 많이 했었지만 2012년 가을에 오픈하고 반 년 정도가 지난 2013년 5월. 매장을 운영하며 내부에 보수해야할 곳들이 생겼다. 당시 1호점을 운영하고는 있었으나 불어난 멤버들의 월급은 감자집에서만 나갈 수 있었기에, 매장 하나를 문 닫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머리를 맞대던 중 매장 내부는 보수를 하되, 테이크아웃으로만 3500원짜리 양념감자튀김을 1000원에 파격적으로 할인하는 이벤트를 해 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이참에 매장 앞에 손님들 줄을 어마어마하게 세워 ‘줄 서서 먹는 곳’이라는 홍보효과를 누려보기로 했다. 예상대로 엄청나게 많은 손님들이 줄을 서서 감자튀김을 기다렸고, 중간에 감자가 모자라서 업체에 다급히 전화하여 퀵으로 받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기다리는 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받는 이벤트까지 진행하여 마지막 감자가 끝난 저녁 10시까지 진행했다. 이 때 찍어놨던 사진은 마치 경복궁에 놀이동산이라도 생긴듯한 풍경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후 경복궁 감자집이 1주년 되던 날에도 크림생맥주 500cc를 1000원에 판매하며 당시 최고 매출을 바꾸는 기록도 세웠다.
이 외에도 수능 전날에 배화여고 앞에 찾아가서 피켓을 들고 사탕과 초콜렛을 나눠주며 응원전을 해 주기도 하고, 스승의 날에는 선생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한 반을 뽑아 감자튀김을 쏘는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했다. 원래는 1등 반을 뽑으려고 했으나 매일 보던 학생들의 얼굴이 아른아른 거리기도 했고, 워낙 다들 사진을 잘 찍어서 보내줘서 도저히 고를 수가 없어 사진을 보낸 10반 모두에게 감자튀김을 쏘는 큰 이벤트로 바꾼 적도 있다. 외부인 출입 금지인 교칙이 있었지만 교장선생님의 허락까지 받고 오전 내내 튀긴 감자튀김 300인분을 다마스에 싣고 배화로 떠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청년장사꾼다운 색깔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스타일로, 정말 어떻게 보면 감자튀김과 맥주 하나만으로 줄 세우는 매장을 만들 수 있었던 건, 청년장사꾼 매장에서밖에 볼 수 없었던 분위기와 멤버들 때문이지 않았을까?
5.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까지
2013년 여름. 청년장사꾼은 유난히 매체에 많이 소개가 되었다. KBS 다큐멘터리 ‘파노라마’에 한국의 청년 창업 단체로 소개되기도 하고, 뉴스 인터뷰도 많이 보도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임팩트가 있었던 건 MBC 시사매거진 2580이었다. ‘시장으로 간 청년들’이라는 이름으로 경복궁 감자집과 청년장사꾼이 소개되었는데, 방영이 되는 시간까지도 우리는 그 인기를 실감하지 못했으나 방송이 끝나자마자 끊이지 않고 왔던 지인들의 연락들을 통해 ‘열정감자’가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복궁 감자집을 오픈한 초기부터 운이 좋게도 SBS 출발 모닝와이드, KBS 생생정보통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소개가 되었고,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등 굵직한 신문사에서도 청년장사꾼의 이야기를 다뤘다. 우리가 먼저 보도자료를 작성해서 기자분들에게 직접 메일을 보내던 초반 이후에는 어떻게 청년장사꾼과 감자집의 소식을 알게 되었는지 먼저 취재 요청이 와서 청년장사꾼의 장사나 교육, 지역 문화 등이 많은 분들에게 알려졌다. 프로그램 내 짧은 코너로 다뤄지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KBS ‘다큐 공감’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로 풀어주셨고, 이후 KBS ‘사람과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청년장사꾼의 첫 독립매장의 점장인 운석이의 이야기를 1시간 동안이나 지상파 방송 황금 시간에 편성했다.
장사를 하며 이렇게 많은 방송에 소개된 단체가 있을까? 처음엔 정말 운이 좋게 방송되기도 했지만 청년장사꾼이 아마 장사만 하는 곳이었다면 이렇게 좋은 기회가 없었을 것 같다. 청년장사꾼의 ‘장사’, ‘교육’, ‘지역문화’라는 키워드들이 어우러졌기에, 우리의 역사들이 이렇게 좋은 형태로 기록되고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해 본다.
금천교시장 내에 자리를 잡았던 3호점 꼬치집과 5호점 골뱅이집
6. 좋은 날이 있으면 궂은 날도 있는 법
처음에 경복궁 감자집을 열고, 인사를 하고, 주변 상인 분들의 응원도 받으며 즐겁게 장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늘 좋은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사실 장사를 하며 주변 상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우리도 지금까지 5개가 넘는 거점지역에서 장사를 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지금은 경복궁에 매장이 하나도 없지만 제일 많았을 때는 한 골목에 매장을 3개까지 운영했던 때가 있었다. 2호점인 경복궁 감자집을 운영하며 먹여 살려야 할 멤버들이 늘어나 3호점을 오픈했다. 3호점은 감자집에서 100m정도 떨어진 같은 골목에 있었던 ‘꼬치집’이었다. 다른 상권도 알아봤지만, 이미 우리가 잘 아는 골목이었다는 점과, 인테리어를 새로 할 부분이 별로 없어서 바로 오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자리였다. 게다가 같은 골목 안에 위치했기에 무슨 일이 있을 때 서로 도울 수도 있고, 효율적으로 매장 두 개를 관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바로 계약을 진행하고 매장을 오픈했다. 그렇게 두 매장을 같이 운영하며 감자집을 오픈한 지 1년 정도가 지났을 때, 꼬치집 바로 옆옆 자리가 나왔다는 정보를 받았다. 이 곳 역시 자리에 비해 조건도 좋았고, 오랫동안 함께 한 멤버들의 급여를 올려줄 수 있을 정도로 위험 요인들이 적었던 곳이기에 새로운 아이템인 ‘골뱅이집’을 오픈했다. 이렇게 정말 어쩌다 보니 짧은 먹자골목 안에 청년장사꾼의 매장이 3개가 되었다. 처음 꼬치집을 오픈했을 때만 해도 주변 분들이 열심히 해서 또 오픈을 했다고 축하해주셨지만, 세 번째로 매장을 오픈했을 때에는 “이러다가 청년들이 이 골목 다 잡아먹겠어~”라는, 조금은 말에 뼈가 있는 이야기도 들었다.
처음에는 호의적이기만 했던 상인 분들이 우리 매장들에 여러 가지로 신고를 하시기도 했다. 감자집 옆에 우리는 주인 할머니의 허락을 받고 운영을 하던 야장도 우리한테만 신고가 들어왔고(이 시장 골목은 워낙 많은 매장들이 야장을 펴고 운영하는 곳이다), 우리가 매장 밖에 나와 주변 분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불법적인 호객 행위라는 신고가 들어왔다.
바뀌기 전과 후의 경복궁 감자집의 모습
7. 지키지 못한 이름, ‘열정감자’
사실 여러 가지 민원이나 신고도 처음에는 겁을 먹었지만 익숙해지기도 했고, 나름 요령이 생겨서 잘 해결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아마 제일 큰 타격을 받았던 건 상표권 문제였을 것이다. 많은 언론에 나오며 저절로 청년장사꾼의 이름도 알려졌다. 그리고 MBC 시사매거진 2580에 소개되어 열정감자가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바로 다음 날 아침. 유명 상표 브로커는 열정감자 상표를 등록했다.
그야말로 무지로 인한 실수였다. 사실 몇 번 지인들로부터 상표등록은 했냐는 질문을 받긴 했었다. 안일하게 해야지, 해야지, 하던 것이 그만 때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제야 아는 분들에게 소개를 받아 변리사님과 이야기를 시작했고, ‘열정감자’라는 단어 자체가 사실 등록 가능성이 높은 편은 아니라는 말씀을 듣고 차라리 이 기회에 ‘청년장사꾼’이라는 모 브랜드를 좀 더 노출시킬 겸 전 매장 이름을 다 ‘청년장사꾼 OO집’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 외에는 ‘열정감자’를 대체 할 수 있을만한 이름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열정감자 자체는 우리였고, 우리를 너무나도 잘 표현하는 단어였기 때문에.
(상표권 분쟁과 등록에 대한 자세한 브런치)
8. 영업정지
과연 우여곡절의 끝은 어딜까? 실제로 경복궁 감자집을 운영하며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민원, 신고, 정말 열악한 환경.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 게다가 야외 테이블에서 드시는 손님들은 여름엔 대형 선풍기, 겨울엔 등유 난로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분들이 감자집의 실내 테이블보다 야외 테이블을 좋아하셨다. 야외 테이블만의 분위기, 조금은 불편하지만 왠지 모르게 정감이 가는 그곳을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참 많았다. 위에도 잠깐 말했듯, 감자집이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야장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골목 전체가 야장을 까는데도 우리 매장만 걸렸다. 이 전까지는 보통 계도(주의를 주는 정도의 경고)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계도 후 1차 경고, 2차 경고까지 받은 후 영업 정지 통지서를 받았다.
9. 그리고 명도소송
아마 이 모든 역경의 끝은 명도소송이 아니었나 싶다. 감자집의 기존 건물주 할머니는 우리를 정말 많이 좋아해주셨다. 처음 매장을 계약했을 때부터 젊은 청년들이 열심히 일하는데 뭐라도 도와줘야지라며 말도 안 되는 월세를 계속 지켜주셨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시끄러웠을 법도 하지만 우리가 가끔 명절 때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정도로 좋은 분이셨다. 하지만 워낙 연세가 많으셨고, 할머니를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지자 편찮으신가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건물주는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소장’이 날아왔다. 계약기간이 아직 남아있지만 바뀐 건물주는 우리에게 나가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상가 임대차 보호법에 따라 근거가 없으면 나가게 할 수 없을 텐데요?”라고 말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들이 법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어쨌든 다행이도 나름 원만하게 해결되며 마무리가 되었고, 이와 관련된 내용은 페이스북 글을 첨부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 경복궁, 서촌에 위치한 청년장사꾼 감자집(舊 열정감자)은 개인적으로 참 의미있는 곳이다
이 작은 매장에서 느낀 장사의 희로애락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소상공인들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문제들을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배웠다. 자세히 쓰면 책 한 권도 나올 법한 일들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당시에는 매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땐 그랬지’라는 말로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이 매장을 접는 것이 참으로 아쉽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다.
1호점이 잘 안 되고, 그 때 가진 모든 것을 다 걸었던 2호점 경복궁 감자집이 잘 되지 않았다면 다음 매장은 없었을 것이고, 지금의 열정도도 없었을 것이다. 경복궁 감자집 덕분에 시장에서 시작한 청년장사꾼이 백화점에 입점하기도 했고, 지금은 40명이 다 되어 가는 멤버들의 월급도 줄 수 있고, 또 나는 감자를 팔아 장가도 가고 예쁜 아들도 낳았다.
장사는 쉽지 않다.
경복궁 감자집같은 매장을 다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었지만 손님들에게도 정말 많은 의미가 있었던 경복궁 감자집은 돈을 몇 억을 주고 만들라고 해도 만들 수 없는 매장이다. 모든 곳에 청년장사꾼 멤버들의 손때가 묻어있는 이곳을 이제는 보내주려고 한다.
대한민국에는 ‘안 되면 장사하지 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왠지 장사를 하면 돈을 엄청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고, 내 시간도 많이 생길 것 같고, 내가 하면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 같고, 단골을 만드는 그런 매장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들을 하는 분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장사, 정말 쉽지 않다. 무턱대고 덤벼들었다간 큰 코 다치기 일쑤다. 준비를 아무리 하고 시작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장사다. 이 말이야 말로 청년장사꾼이 장사를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 있는 경복궁 감자집을 닫으며 할 수 있는 말이다.
경복궁 감자집 안녕! 그 동안 고마웠고,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