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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룽지조아 Nov 08. 2023

9. 부러짐과 타협

제5장 기타 개념에 대하여

기존 강자는 새 강자가 떠오르면 약자가 된다. 약자가 형세를 오판하고 머리 뻣뻣이 세우다가 부러질 수 있다. 대표적 인물이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처형당한 프랑스 왕국의 마지막 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다.


1700년대 프랑스는 봉건제 사회였다.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이 전 인구의 2%다. 이들은 세금을 면제받았고, 관직을 독점했으며, 토지의 40% 이상을 소유했다. 반면 제3신분인 평민(시민, 농민, 노동자)은 전 인구의 98%였다. 세금을 과중하게 부담했고, 정치 참여 권리는 없었다.


평민 중 부르주아 계급이 부를 축적하여 성장했으나, 귀족만큼 인정받지 못했다. 평민 계급이 부담하는 세금이 전쟁으로 엄청 늘어났고, 혹독한 식량난까지 겹쳐 불만이 많았다. 이런 평민 계급의 쌓인 불만이  프랑스 대혁명발단이 되었다.


루이 15세가 죽자 손자인 루이 16세는 20세에 부르봉 왕국의 왕이 되었다(1774.5.). 그때 부르봉 왕국은 7년 전쟁(1756~1763,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 등 vs 영국·프로이센·포르투갈) 등으로 비용을 과다 지출해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 있었다.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전쟁(1778~1781)에서 영국에 맞선 미국을 지원하였다. 영국에게 7년 전쟁에서 패배한 아픔을 되갚고 영국의 신대륙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전쟁 비용으로 재정이 더욱 악화되어 국가 경제가 파탄 났다.


성직자와 귀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재정 개혁이 절실히 필요했다. 루이 16세는 재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성직자와 귀족이 반대하여 번번이 좌절되었다. 


루이 16세는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베르사유에서 삼부회를 소집했다(1789.5.5.). 삼부회의 대의원은 성직자 294명, 귀족 270명, 평민 578명이었다. 성직자와 귀족은 세금 개혁안을 반대했다. 반면 평민 대의원은 세금 개혁안을 찬성했고, 성직자와 귀족의 특권과 부동산에 대한 권리 폐지를 주장하였다. 


성직자·귀족과 평민 대의원은 표결 방식을 두고 대립하였다. 성직자·귀족 대의원은 신분별로, 평민 대의원은 머릿수대로 투표해야 한다고 했다.


평민 대의원들은 특권 귀족층이 전 국민의 98%를 차지하는 평민에 기생한다고 비판했다. 자기들 주장이 통과될 가망이 없자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1789.5.).


루이 16세는 평민 대의원이 있는 회의장을 폐쇄하였다. 개혁적인 입장을 바꾸었고, 제3신분과 타협을 주장한 재무장관 네케르를 전격 경질했다.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기 위해 군 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국민의회는 국민의회가 제헌 의회임을 선포했다(1789.7.9.). 국민의회가 지휘하는 민병대를 파리에 창설하였다. 민병대는 군수품을 확보하기 위해 군인병원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함락시켰다(1789.7.14.). 국민의회는 제1신분의 십일조 권리, 제2신분의 장원 보유, 인신 예속의 권리 등 봉건 세력의 특권을 폐지하였다(1789.8.3.).


또한, 국민의회는 인권 선언을 발표하였다(1789.8.26.).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내용이었다.


국왕 일가는 봉건제도 폐지 안건을 승인하지 않았다. 국민의회는 국왕 일가를 체포한 후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이송했다. 루이 16세는 도망치다 국경 지역인 바렌에서 체포되었다(1791.6.20.).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려고 했다. 성직자와 귀족은 혁명이 일어나자 국외로 망명했다.


온건파는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왕조를 인정하는 입헌군주제를 실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도망가다가 잡혀 혁명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혁명정부와 민중은 충격을 받았고 입헌군주제할 때 옹립할 왕이 없어졌다. 루이 16세의 정치 생명이 이것으로 끝났다.


프랑스는 혁명 파급을 두려워한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였다(1792.4.~1792.9.). 의용군을 모집했다. 발미 전투(1792.9.20.)에서 승리해 적군을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국민의회는 공화정을 선포했고, 프랑스 제1공화국을 수립하였다(1792.9.).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적국인 오스트리아 및 그 동맹국과 내통 혐의로 사형이 판결됐다. 그 후 루이 16세는 파리의 광장 단두대에서 처형되었고(1793.1.21.), 마리 앙투와네트도 같은 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1793.10.16.).


중세 봉건제에서 공화정 체제로 넘어가는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루이 16세는 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평민 대의원이 있는 회의장 폐쇄, 타협을 주장한 재무장관 네케르 해임, 국민의회 해산 목적으로  동원령, 봉건제 폐지 안건 미승인, 야간 도주 등 이미 힘이 기운 성직자와 귀족의 편에 섰다.


정치권력은 힘이 센 세력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흐름이 바뀐다. 루이 16세는 약자로 변했는데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했다. 타협을 거부하고 나만 존중하는 자존심을 세우다가 이적 혐의로 단두대에 끌려가 죽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었으균형을 다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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