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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룽지조아 Nov 25. 2023

8. 평화

제7장 공동체에 대하여

전쟁은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남긴 채 지나가고 평화가 찾아온다. 이 땅이 평화롭지 못한 경우 나도 행복할 수 없다.


평화정책을 잘 편 인물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를 들 수 있다. 그는 동방 정책을 폈으며 독일 통일과 유럽 평화에 디딤돌을 놓았다.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브란트인물은 나치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망명하여 히틀러와 싸우고 종전 후 귀국하여 서베를린 시장과 서독 총리가 되었다. 특이한 인물이다. 마치 한국의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외국으로 망명하여 일제와 싸우고 종전 후 귀국하여 일본 수상이 된 느낌이다. 브란트가 소련과 동유럽에게 나치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사과하고 평화 협정이나 화해 협정을 맺을 때 브란트의 진정성을 더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었을 것 같다. 


68 혁명 등 변화를 요구하는 서독의 국내 상황으로 인해 정권 교체를 이루었으며 브란트는 총리가 될 수 있었다.


브란트가 총리가 되기 이전 서독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1950년~1960년대 냉전 시대였다. 미국과 소련이 치열하게 무기와 외교로 경쟁하는 시대였다. 서독과 동독도 경제, 외교 등에서 힘으로 경쟁했다. 기민당 집권기 때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쳤다. 동독을 승인하는 나라를 외교를 맺지 않는 할슈타인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1950년~1960년대 라인강의 기적 시기였다. 자본주의 발전으로 대량 소비하고 풍족한 삶을 누렸다. 기민당의 아데나워 정부는 나치에 협력했던 자들을 기용했으며 사회 분위기는 두발 규제 등 권위적이고 보수적이었다.


1950년~1960년대 서독의 우익 기독교민주당(이하, 기민당)이 20년 동안 독주하던 시기였(1949.9.~1969.10. 아데나워 5차 내각, 에르하르트 2차 내각, 키징어 1차 내각). 


브란트가 총리가 되기 전은 냉전 시대였고 전쟁의 빈곤에서 잘 살게 된 서독에서 다른 요구들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서독에서 68 민주화 혁명이 일어났다. 20대들은 모든 형태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을 외치며 권위주의 문화, 자본주의, 정치권에 기용된 나치 인물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강력하게 저항했다.


1967년 6월 독재 정권인 이란 팔레비 국왕이 베를린을 방문했다. 학생들은 독재 정권이 서독을 방문하는데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총격으로 시위 학생인 오네조르크가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슈프링어 출판사(빌트지 발행)를 비롯한 우익 언론들은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며 진압과정에서 폭도 1명이 사망했다고 악의적으로 왜곡 보도를 했다. 이런 언론의 태도에 시위대가 자극받았다.


탈권위주의, 전쟁 반대, 나치 청산, 자본주의 비판의 구호를 외친 68 혁명이 서독에서 일어났다. 1968년 2월 서베를린 국제 베트남 회의 개최를 계기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학생 시위가 격화되었다. 1968년 4월 학생 운동 지도자 두치케(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 SDS)가 베를린에서 우익주의자에게 피습을 당해 머리, 빰, 가슴에 총상을 입었다. 저널리스트, 좌파 등은 소비 중심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백화점에, 언론 왜곡보도를 한 빌트지 수송차량에 불을 질렀다. 1968년 5월 긴급조치법 의결(조직적인 시위 금지)로 노조와 연대하여 반대 시위가 격화되었다. 서독 내 우익과 좌익이 치열하게 싸웠다. 68 혁명 후 기민련의 독주를 견제할 세력으로 사회민주당(이하, 사민당)을 지지하는 국민이 늘어났고, 언론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68 민주화 혁명으로 사민당의 지지율이 높아져 기민당의 20년 독주가 막을 내렸다. 정권 교체가 되었다. 1969년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1969년~1974년)가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하여 총리가 되었다.


브란트 서독 총리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브란트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공존을 추구했다.’ 브란트는 당원이나 동료들과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주변국과 대화하고 협력했다. 나치가 피해를 끼친 국가에게 진심으로 반성을 하고 화해 협정을 체결했다. 현실에 바탕을 두고 실익을 선택하는 실용주의자였다.


취임 연설에서 “독일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독일 민족은 협력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평화를 위해서 이미 있는 나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데나워 등의 기민당 총리는 서방과 동맹을 강화해 힘으로 동독을 흡수하려고 했다. 브란트는 냉전 시대의 힘으로 제압하는 외교를 과감하게 벗어던졌다. 기민당과 정반대의 외교 정책을 폈다. 동독, 소련 및 동구권에 화해 정책(동방정책)을 펼침으로써 평화와 공존을 추구했다.


브란트는 적국인 동독의 존재를 인정하고 동서독 정상회담(1970.3., 1970.5.)을 했으며, 동서독 기본조약(1972.12.)을 체결했다. 자유로운 왕래, 교통, 통신 등을 보장하여 긴장을 완화했다. 정치범을 돈으로 사 오는 정책, 고속도로 통행료를 서독 정부가 일괄 납부 등 동서독의 상호 교류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동서독이 UN에 동시 가입했다(1973.9.).


브란트는 나치에게 피해를 입은 동유럽 국가와 소련에게 나치의 잘못을 반성했고 화해 협정과 우호조약을 맺었다. 소련과 불가침 조약(1970.8.),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1970.12.), 미·소·영·프의 4강과 베를린 협정(1972.6., 동서독 문제는 독일 내부 문제라는 내용), 체코슬로바키아와 우호조약(1973.12.) 등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통해 적국과의 대립을 평화로 바꾸었다. 고르바쵸프 회고록에 따르면 통일시켜 줘도 별 문제없을 것 같고, 과거 문제였던 독일이 아니고 변했음을 느꼈다고 한다.


‘브란트는 세계정세 변화를 잘 읽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미국과 소련은 외교와 핵전력으로 경쟁을 했다. 1960년대 말에 양국은 핵전력을 충분하게 보유했고 대등한 수준이었다. 군사력 경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고, 경제에 부담만 되었다. 1968년 11월 소련의 브레즈네프는 공산주의 진영이 침공당하면 군사 개입할 권리를 가진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발표했다.


1970년대 초 미국은 평화 공존과 긴장 완화 정책으로 전환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궁지에 몰려 있었고,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1972년 닉슨은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과 국교 수립, 중국의 유엔 가입과 상호 교류에 합의했다. 또한 1972년 5월 미국과 소련은 전략무기 감축협정(SALT)을 맺었고 유럽에도 데탕트 시대가 열렸다. 브란트는 세계정세 변화에 기민하게 움직였다. 동독과 주변국을 존중했으며 화해협정을 맺었다. 1970년대 평화로 전환되는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움직여 독일의 운명을 바꿨다.


'브란트는 비판을 받았다.' 상호 존중하고 적과 공존을 모색하는 리더는 비판을 받는다. 브란트는 갈등을 토론이라는 합의 과정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그 결과 소통이 원활하고 합의를 통해 결속이 강화되었으나 결정은 미루어졌다. 브란트는 대중들에게 온갖 악평을 들었다. 서독 보수 언론에게 브란트를 미혼모의 자식, 철새 정치인, 조국을 버린 배신자 등 신랄하게 비판당했다. 우유부단하고 주저하는 정치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서독 보수세력은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고(1972.4.), 동독과 체결한 기본조약의 위헌 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1973.5.). 결국 불신임안과 위헌 심판은 부결되었다.


사랑과 평화가 대립을 이긴다. 싸우지 않기 위해서 리더는 상호 존중과 이해, 공존에 대한 인식과 소통 능력이 필요하다. 반목하고 대결해 봐야 분단을 영구히 고착을 시키고 주변국에게 이용만 당한다. 실익은 없다. 이념 대결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화해의 작은 걸음이 낫다.


“평화가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평화가 없으면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 빌리 브란트 1981년 11월 3일 연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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