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독으로 분단되어 서로 싸우던 대립을 평화로 바꾼 인물이 브란트였고, 독일 통일 후 갈등을 포용함으로써 치유한 인물은 메르켈이었다.
메르켈에게 많은 긍정적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여성 최초의 총리, 16년 장수한 총리, 70%~80%의 높은 지지율에도 자진 퇴임한 최초의 총리, 2015년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 등이다.
메르켈이 등장하기 전 통일 독일은 유럽의 병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재정적자가 컸고 물가상승률은 높았다. 실업률이 10% 이상이었고, 경제성장률은 하락했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독일은 통일 후유증을 심하게 앓았다. 1990년 통일 후 여러 문제가 나타났다. 동독을 재건하고 실업자의 생계를 지원하기 위해 많은 돈을 썼다. 1991년부터 2005년까지 총 1조 4,000억 유로를 지출했다. 매년 연방예산의 25%~30%, GDP의 4%~5%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1990년부터 2007년까지 연평균 464억 유로의 재정적자가 발생하였다. 재정적자로 물가가 상승했으며,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연대세를 신설했고, 유류세, 사회 보험료와 부가가치세 등을 인상했다. 물가 상승과 세금 인상 등으로 국민들은 살기 힘들었고 급속하게 우경화되었다.
동독을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해야 했다. 통일 전 동독 기업은 사회협동기업 형태였고, 자동차, 시계, 소총, 사진기 등 공산품을 공산주의 국가로 수출했다. 실업률은 거의 0% 수준이었으나, 사실 사회협동기업에는 과잉 노동력이 존재했다. 또한, 1990년 5월 서독과 동독은 1:1로 화폐를 통합했다. 서독의 화폐 가치가 동독에 비해 3배 이상 비쌌다. 동독 주민의 총파업 등 결사반대와 동서독 국민이 평등하다는 생각으로 연대하기 위해 1:1로 할 수밖에 없었다. 실질 가치에 기반하지 않는 화폐 교환비율로 인해 동독에서 임금이 상승했으며, 동독 제품의 품질은 안 좋은데 가격만 올라가 경쟁력을 상실했다. 시장이 외면하여 동독의 많은 기업이 도산했고 대규모 실업이 발생했다.
동독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동독도 서독처럼 잘 살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동독에 생산시설을 갖추고 기술 교육을 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동독의 과잉 노동력이 서독으로 이동했다. 서독은 노동 공급 초과 상태였으나, 동독의 인구는 점점 줄어들었다. 동독 산업의 60%가 사라졌다. 동독 노동자는 실직 공포, 자포자기 등 심리 불안에 시달렸고 폭력이 증가했다. 또한, 동독 주민은 가난한 2등 국민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메르켈이 등장하기 전인 2004년 통계에 따르면 독일 내 외국인의 수는 730만 명(전체 인구의 9%)에 달했다. 독일에서 외국인 이민자가 증가하여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이민자들은 가난했고 주로 단순 노동 분야에 종사했다. 이민자 자녀도 독일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으며, 대학 입학률도 낮았다. 대부분 취업을 걱정했고, 가난이 대물림되었다. 극우파들은 피부색이나 종교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민자에게 폭력, 살인 등 테러를 가해 사회 문제가 되었다. 갈등이 갈수록 심해졌다.
통일 독일이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는 포용과 평화였다. 국내 측면에서 동독을 재건하고, 동독인과 이민자에 대한 갈등을 치유하고 포용하는 숙제였다. 국제 측면에서 미·소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새로운 평화질서를 세우는 숙제였다.
이런 시대적 과제를 잘 푼 인물이 메르켈이었다. 대화로 갈등을 치유해 포용하며, 잘못한 일은 끊임없이 사과함으로써 평화를 추구했다. 앙겔라 도로테아 메르켈은 2005년 8대 총리가 되었고 4번 연임했다(2005.11.~2021.12.). 메르켈의 리더십을 엄마 리더십(Mutti leadership)이라고 부른다. 권력을 과시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포용하고 결정이 필요할 때는 결단하는 리더십이다.
메르켈 집권기에 실업률이 하락했다. 2005년 이후 GDP가 34% 성장했고(자료원: REUTERS GRAPHICS 2021.9.14.) 수출이 급격히 늘었다. 닥스 지수는 약 5,000에서 15,000으로 올랐다. 독일 황금의 10년(2004년~2014년), 제2의 라인강의 기적의 시대였다. 메르켈이 시리아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독일이 나치 만행국에서 인도주의 나라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또한 유럽연합을 강화하여 유럽의 평화를 이루었다.
메르켈이 이런 성과를 내는 데에 경제 환경 변화의 덕을 크게 보았다. 이 시기 유로화가 단일 통화로 사용되어 독일 제품의 품질은 좋은데 환율 영향으로 가격이 싸져 경쟁력이 올라갔다.
메르켈에 대해 살펴본다.
‘메르켈은 사람들의 걱정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중요한 현안을 처리할 때 다른 의견들을 다방면으로 고려한 후 이해관계를 조율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그러나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라고 역설했다.
2013년 9월 선거에서 기민당과 기사당 연합의 지지율은 41.5%였으나, 연정 파트너인 자민당이 원내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25.7%를 얻은 사민당과 연정이 필요했다. 메르켈은 사민당이 주장한 연금제 개혁, 신재생 에너지 비중 확대, 최저 임금제 도입 등의 정책을 과감히 수용했다. 2013년 11월 기민당 총리, 기사당 당수와 사민당 당수는 17시간 이상의 긴 협상 끝에 185쪽의 연정 합의문에 서명했다.
‘메르켈은 다른 사람 의견을 경청했다.’ 메르켈은 남의 말 듣는데 80%, 자기 말을 하는데 20%를 쓴다. 메르켈은 빠르고 쉬운 길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여론이 형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념이나 비전 등을 꺼내 갈등을 일으키기보다 화합과 실리를 중시했다.
‘메르켈은 유럽연합을 튼튼히 해 평화를 이루었다.’ 독일은 유럽연합(European Union)을 확대,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유럽 속의 독일을 지향했다. 미·소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평화를 이룰 수 있었다. 힘은 있지만 그 힘을 주변국에게 일방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독일의 힘은 유럽국가들과 협력해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이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2015년 시리아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 120만 명을 수용했다. 메르켈은 총칼로 위협하면서 난민을 거부하면 더 이상 독일은 내 조국이 아니라고 연설했다. 국민들은 시리아 난민 수용을 반대했으며 메르켈의 지지율은 역대 최저 지지율 50% 미만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메르켈의 이런 정책으로 독일은 나치 만행국에서 벗어나 인도적인 나라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서로 달라도 포용해야 하는 이유는 두 명이 다른 방향에서 동전을 보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와 상대 사이에 동전을 세웠다. 나는 앞면을 보고 있고, 상대는 뒷면을 보고 있다. 내 입장에서 앞면인데 상대 입장에서는 뒷면이다. 동전을 기울이면 나와 상대는 옆면만 본다. 앞면도 뒷면도 아니다. 동전은 보는 각도에 따라 앞면, 뒷면, 앞면도 뒷면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는 면이 앞면이라고 고집할 수 없다.
상반된 것을 포용해야 온전하다. 포용하는 사람은 상대를 존중하고 의견을 경청하며 상대와 타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