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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룽지조아 Mar 12. 2024

55. 언행과 생각에 걸림이 없고, 가리지 않고 아낀다

도덕경 제27장

도에 맞는 언행과 생각은 스치는 바람처럼

상이 없어서 행해도 자취를 남기않으며,

말이 거의 없어 말해도 꾸짖을 허물이 없고,

판단하지 않아 생각함에 이해타산이 없다.

이렇듯이 가리는 것이 없어 걸릴 것도 없다.


도에 맞음은 오는 봄을 막을 수 없듯

닫아 빗장이 없어도 열 수가 없고,

묶어 새끼가 없어도 풀 수가 없다.

이렇듯 의도로 안 해도 못 하는 게 없다.


도는 스치는 바람처럼 가리는 게 없고,

 되면 오가는 봄처럼 저절로 오가며,

악이든 선이든 도를 가로막을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도를 품고 따르는 성인은

늘 사람을 잘 구원해 버리는 사람 없고,

늘 만물을 잘 구원해 버리는 만물 없다.

이것을 가려진 밝음이라고 한다.


따라서

도에 맞는 선인은 악인의 스승이고,

악인은 도에 맞는 선인의 제자로다.

스승인 선인을 존중하지 않고,

제자인 악인을 아끼지 않으면

비록 알지라도 크게 헤매므로

이것을 수없이 묘하다고 한다.


善行無轍迹, 善言無瑕讁, 善數不用籌策,

선행무철적, 선언무하적, 선수불용주책,

善閉無關楗而不可開, 善結無繩約而不可解.

선폐무관건이불가개, 선결무승약이불가해.

是以聖人常善救人, 故無棄人,

시이성인상선구인, 고무기인,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상선구물, 고무기물, 시위습명.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고선인자, 불선인지사, 불선인자, 선인지자.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知大迷, 是爲要妙.

불귀기사, 불애기자, 수지대미, 시위요묘.


도에 맞는 언행과 생각은 고정된 형상이 없고 가리는 게 없어 걸림이 없다. 오는 봄날을 악인도 막을 수 없으므로 선이든 악이든 방해하지 못하고 도는 어떤 상황이든 못 하는 게 없다. 성인도 어떤 사람이든 어떤  만물이든 가리지 않고 늘 사람을 잘 도와 벗어나게 한다(구원한다). 도에 맞지 않는 악인도움을 받아 도에서 어긋난 에서 벗어나야 할 제자일 뿐이다. 도에 맞는 선인이든 맞지 않는 악인이든 존중하고 아낀다. 악인을 아끼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헷갈릴 수 있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묘하다고 말했다.


'도에 맞음은 스치는 바람 같다.'

도는 상이 없다. 바람은 누구에게만 불어야 한다는 형상이 없고, 바람이 불었다는 고정된 형상을 남기지 않는다. 행해도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도는 말이 없다. 희언자연(希言自然)이라고 했다. 별 말 안 하고 자발성에 맡긴다. 지적질하고 간섭하는 말을 해 보자. 상대는 엄청나게 반발한다. 지적질하지 않고, 간섭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거의 하지 않고, 말해도 그런 말이 없으니 꾸짖을 허물이 없다고 표현했다.


도는 가리지 않는다. 외부 존재를 선과 악, 이(利)와 해(害) 등으로 사사로이 판단하지 않아(無私) 공평하다. 헤아림에 이해타산의 꾀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도에 맞음은 오는 봄과 같아 막을 수 없다.'

오는 선인이나 악인이 막을 수 없다. 도는 의식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오는 봄날처럼 작용한다. 빗장으로 닫지 않았는데도 밝음이 닫혀 어둠이 오고, 겨울이 닫힌 후 봄이 온다. 새끼로 묶지 않았는데도 태풍을 바람과 비로 나눌 수 없다. 잘 닫아 빗장이 없어도 열 수 없고, 잘 묶어 새끼가 없어도 풀 수 없다고 표현했다. 도는 이렇듯 의도로 하는 게 없으나 못 하는 게 없다(無所不爲).


'도는 가릴 게 없고 못 하는 게 없어 악도 가리지 않는다.'

도는 가리는 게 없다. 스치는 바람처럼 대상에 집착하거나, 돕고도 도왔다는 상(相)이 없어 늘 사람이나 만물을 잘 구제한다. 사사로움이 없어 이해타산을 계산하지 않고 공생한다.


도는 못 하는 게 없다. 오는 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도를 막을 수 없다. 악이든 선이든 도가 하는 일을 방해할 수 없으므로 도는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도를 따르는 성인도 마찬가지다. 늘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잘 도와주고 악에서 벗어나게 구원해 준다. 버릴 사람이나 만물이 없다.


이런 이치는 밝은 진리인데 사람들은 헷갈려하고, 손해 볼까 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살짝 가려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가려진 밝음이라고 한다.


도는 다 할 수 있다고 치고, 인간인 이상 어떻게 못 하는 게 없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생각으로는 환경의 흐름에 집중하고, 흐름의 방향을 유심히 바라보며, 흐름에 내맡기는 방법이 있는 것 같다. 내가 하려고 하지 않아도 흐름이 나를 데려가 다. 나는 힘들 게 할 것도 억지로 할 필요도 없다. 환경의 흐름(또는 자연의 이치)에 내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성인에게 악인은 피하는 존재가 아니고 도와주어야 할 제자처럼 아껴야 하는 존재다.'

악인은 처벌하고 피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인의 생각이다. 말하는 자가 성인이라는 점에 유념한다. 성인은 도를 긴 기간 수양하여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은 사람이다. 악인이 물감이라면 성인은 하늘 같은 존재여서 하늘에 물감을 뿌려도 전혀 물들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하늘에 물든다. 극히 넓고 커서 선인이나 악인이나 이런 것에 대한 상이 없어 가리지 않고, 악인이라도 성인을 방해할 수 없다. 백성을 선악으로 구분하지 않고 포용한다. 성인은 선한 이를 악인의 스승으로 여겨 존중하고, 악인을 선한 이의 제자로 여겨 아낀다.


일반인은 당연히 악인을 멀리할 수 있다. 다만 분별함으로써 제대로 못 보고 거기서 발생하는 고통을 알고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 성인은 그런 분별도 벗어난 사람이다. 어미의 심정이므로 엇나가는 자식을 미워하지 않고 가엽게 생각한다. 무엇이라도 돕고 싶고 따뜻하게 대한다. 자식이 남에게 해 끼치는 그 악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 정상적으로 살기를 바란다. 엇나간 자식은 버려야 할 사람이 아니라 배워야 할 제자일 뿐이다.


사람들은 선악을 구별하고, 악인을 응징해야지 왜 아끼냐고 따진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도의 접근법으로는 상호 대립하는 선과 악은 하나로 꼬여(抱一) 구별되지 않고,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 가치다. 또한 누가 응징할지, 누구를 응징해야 하는지 모호하다. 인간은 모두 크고 작은 악행을 범하므로 응징하는 주체가 마땅치 않다. 또한 악인이 반성하여 선한 사람이 되었다면 현재시점에 처벌받을 악인이 없다.


선악을 구분하여 차별하면 결국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고, 싫어하는 것을 증오하는 마음이 자리 잡아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노자는 사람들이 알더라도 헤매는 사항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묘하다고(要妙) 표현했다. 요묘(要妙)는 중요한 묘함의 뜻이 닌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묘하다는 뜻의 관용어로 중묘(衆妙, 1장)와 같은 표현이다.


성인은 형상이 없어 도에 맞는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도에 맞지 않아도 선하게 대하니 베푼 덕이 선하다(4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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