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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룽지조아 Mar 18. 2024

61. 세상 모든 것 속에 도가 깃들어 있다

도덕경 제21장

비어 깊은 덕의 겉과 속 모양은 오직 도만을 따르고,

도가 만물을 이루니 오직 눈부셔 어릿어릿할 정도다.

 

어릿어릿할 정도로 눈부시구나!

그 만물 안에 도의 형상이 있고,

눈부시고 어릿어릿할 정도구나!

그 만물 안에 도의 물질이 있다.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어둡구나!

그 만물 안에 도의 정기가 있고,

정기가 너무나 바르고 순수하여,

그 만물 안에 도의 참됨이 있다.

 

만물은 예부터 지금까지

이름이 없은 적이 없으며,

만물의 시초 모습을 본다.

 

나는 어떻게 만물의 시초인 모습을 아는가?

이런 만물 때문이다.

 

孔德之容, 惟道是從. 道之爲物, 惟恍惟惚.

공덕지용, 유도시종. 도지위물, 유황유홀.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홀혜황혜, 기중유상, 황혜홀혜, 기중유물.

窈兮冥兮, 其中有精, 其精甚眞, 其中有信.

요혜명혜, 기중유정, 기중심진, 기중유신.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자고급금, 기명불거, 이열중보.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오하이지중보지상재, 이차.

 

노자는 만물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무형인 도는 유형인 만물을 생기게 하고 만물에 덕성으로 자리 잡는다. 생명체의 유형의 모습은 너무 눈부셔 어릿어릿할 정도다. 생명체의 무형인 에너지와 참됨은 헤아릴 수 없이 심오하고 어둡다.

 

생명체를 만든다고 상상해 본다. 모양틀, 물질, 에너지, 정신이 필요할 것 같다. 모양틀인 형상(象), 모양을 채우는 물질(物), 에너지인 정기(精), 마음에 해당하는 참됨(信)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형상(象)과 물질(物)은 유형에 해당하고, 정기(精)와 참됨(信)은 무형에 해당한다.

 

도가 만물을 만들었으므로 만물 모두에 도가 깃들어 있다. 만물의 모습에서 도를 느낄 수 있다. 만물에 신성에 해당하는 도가 깃들어 있으니 모든 것이 소중해지며, 절로 지금 여기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만물은 도를 따른다.'

세상 모든 것은 도에 의해 만들어졌다. 만물 창조가 덕 중에 가장 큰 덕이다. 만물은 도라는 재료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만물도 음양이 뒤섞인 도의 특성을 따른다. 양의 성질인 밝음이 있어 눈부시고, 음의 성질인 어둠이 있어 어릿어릿하다.

 

비어 깊은 덕(孔德)의 겉모양과 속 모양(容)은 오직 도를 따른다고 했다. 덕을 놓아주어야 덕이 있으므로 비어 깊은 덕(孔德)이라고 표현했고 상덕을 의미한다(38장). 모양(容)에 겉모양과 속모양이 있으며, 만물의 겉모양은 형상(象)과 물질(物)이고, 속모양은 정기(精)와 참됨(信)이다.


황홀(恍惚)은 눈이 부시어 어릿어릿할 정도로 찬란하거나, 미묘하여 헤아려 알기 어려움을 말한다. 도가 배어 있형상과 물질의 유형에 대한 느낌의 표현이고(有), 1장에서 도는 오묘하다(妙)고 표현했다. 요명(窈冥)은 날이 어스레하거나, 이치가 헤아릴 수 없이 깊음을 말한다. 도가 스며 있는 정기와 참됨의 무형에 대한 느낌의 표현이다(無). 1장에서는 도는 심원하다(요徼, 경계, 심오한 경지)표현했다.

 

'만물 안에 도의 모양이 있다.'

세상 모든 것 안에 도의 모양이 있다. 만물 모두는 도의 형상이며, 도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도와 같은 정기와 참됨을 지니고 있다. 정기는 생명의 에너지고, 참됨(信)은 마음이며 본성, 진심, 양심, 천성, 신성, 불성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만물에서 도의 모습을 본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만물은 계속 존재하고, 도에 순응하여 움직인다. 도를 품고 따르는 만물의 모습에서 만물의 시초인 도의 모습을 보고 느낀다.

 

이열중보(以閱衆甫)는 도덕경 백서본에 이순중부(以順衆父)로 표기되어 있다. 열(閱)은 순(順)으로, 중보(衆甫)는 중부(衆父)에 해당한다. 중부(衆父)는 만물의 시초, 시원, 근본의 뜻이다. 백서본을 일부 인용하여 ‘만물의 시초 모습을 본다.’로 번역했다.

 

노자는 만물을 보고 도를 느끼는데 왜 세상사람들의 눈에 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불교는 이렇게 설명한다. 청정한 마음인 불성이 분별 때문에 발생하는 근심과 걱정에 휩싸여 더러워져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나와 남을 나누고, 나에게 이익인 쪽으로 행동한다. 나만의 나에 집착하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나누어 애증에 집착한다. 이익을 취하기 위해 욕심부리며 남과 경쟁한다. 내게 나만 전부라는 허상에 빠져 물질과 육체를 지나치게 중시한다. 분별을 끊기 어렵다. 인간의 근본적 한계다. 다른 것과의 관계나 환경도 내 구성물임을 보지 못한다. 겉모습에 매달려 사유, 판단과 추론하기 때문이다. 근심과 걱정은 외부 존재가 아니라 내 마음이 일으킨다.

 

분별심과 자의식이라는 먼지가 매일 마음에 쌓이고, 먼지뒤덮여 세상이나 도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수행으로 마음의 먼지인 분별심과 자의식을 청소한다. 청소할 때 요령이 필요하다. 외부 존재를 판단하지 않고 몸과 마음에 집중하고 그저 바라본다. 좋아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은 왔다가 가버린다.


마음은 도의 본체며, 몸과 환경은 도가 나타난 현상이다. 따라서 이미 갖고 있는 현재의 몸과 마음이 도다. 지식이나 논리적 고찰은 필요 없다. 우리 속에 있는 도를 통찰하는 게 바로 깨달음이다.

 

상대가 나를 힘들게 해 짜증 날 때가 있다. 이런 의문이 든다. 그 사람이 남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내가 짜증 나는 것은 관계가 있을까? 그가 남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일 수 있다. 뒤집어 보면 나도 그 사람을 이해 못 다. 그래서 내가 짜증 난다.

 

짜증 날 때 '나는?'이라고 외쳐 본다. 짜증이 가라앉고 나를 자주 만난다. 버릴 사람은 없다. 상대가 나를 짜증 나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자가 말한 것처럼 주변에 있는 사람과 사물에서 짜증이 아니라 황홀함과 심오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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