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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도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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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룽지조아 Mar 19. 2024

62. 분별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도덕경 제20장

학문을 끊어 아무 근심이 없다.

공손한 대답과 불손한 대답은

차이가 얼마나 날까?

선과 악은 차이는 얼마나 날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근심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둡구나! 끝날 줄 모르는구나!

여럿이 아주 즐거워하는 모습이

소를 잡아 통째로 누리는 것 같고,

봄날에 누대에 오르는 것과 같다.

 

외부 존재에 집착하지 않아

나 홀로 담담하구나! 

그런 조짐이 없는 게 영아가

무관심해 웃지 않는 것 같다.

 

지치고 고달픈데

돌아갈 데가 없는 것 같구나!

사람 모두 갈 데가 넉넉한데,

나만 홀로 남겨진 것 같다.

 

내 바보와 같은 마음이여!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구나!

속인은 사리 밝고 또렷하나,

나 홀로 아뜩하고 희미하다.

속인은 꼼꼼히 분별하지만,

나만 홀로 딱하고 답답하다.

 

고요하구나! 그것은 바다와 같으며,

높이 부는 바람이여! 그치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 홀로 미련하고 비천하다.

나 홀로 다른 이와 같지 않아,

기르는 어미를 귀하게 여긴다.

 

絶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절학무우. 유지여아, 상거기하?

善之與惡, 相去何若? 人之所畏, 不可不畏,

선지여약, 상거하약? 인지소외, 불가불외,

荒兮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황혜기미앙재! 중인희희, 여향태뢰, 여춘등대.

我獨泊兮! 其未兆, 若嬰兒之未孩,

아독박혜! 기미조, 여영아지미해,

儽儽, 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루루혜, 약무소귀. 중인개유여, 이아독약유.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아우인지심야재! 돈돈혜!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속인소소, 아독혼혼, 속인찰찰, 아독민민.

澹兮其若海, 飂兮若無止,

담혜기약해, 유혜약무지,

衆人皆有以, 我獨頑似鄙.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중인개유이, 아독완사비. 아독이어인, 이귀식모.

 

이해, 시비, 선악의 차이가 많이 나는데 노자는 왜 없다고 하는 걸까? 진짜 이해, 시비, 선악이 없는 걸까?

 

노자의 주장은 이렇다. 외부 존재에 원래 이해, 시비, 선악이라는 것은 없다.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면 인간이 그렇게 판단하여 느끼고 있을 따름이다. 원래 도는 혼성이므로 이해, 시비, 선악 이런 것이 다 뭉쳐 있어 투명하다. 그런데 인간이 가치와 개념을 쪼개 비교하면서 그런 개념이 생긴다. 그래서 인간이 말하는 악은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구원해야 할 제자고 버릴 만물이 없다.

 

A라는 존재나 가치가 있다고 말하면 ~A가 아닌 존재나 가치가 있다는 말과 같다. 선이 있다는 말은 악이 있다는 말과 같다. 참이 있다는 말은 참이 아닌 것이 있다는 말과 같다. A와 ~A 은 쌍으로 존재한다. ~A만을 없앨 수 없다. ~A를  없애기 위해 A와 ~A를 다 없애거나 A를 권장하기 위해 ~A도 포용해야 한다는 논리다. A와 ~A를 포용하는 것이 마음을 비운 경지고 자신을 자신만이 아니고 전체라고 생각하는 경지다(至公無私). 이런 사람에게 세상을 맡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자는 왕에게 분별하지 마라고 한다. 분별은 쪼개 나눠 비교하여 다투므로 우열 경쟁으로 근심이 생긴다. 쪼개 나눠 비교하지 않는 경우 독립된 A와 ~A가 없다. 전체 속에서 서로 관계 맺고 의지하는 존재일 뿐이다. 설령 쪼개 A와 ~A로 나뉘더라도 우열을 따지지 말고, 서로 의지하며 관계를 맺는 존재며, 상대적 가치와 개념임을 알라고 한다.

 

이해, 시비, 선악은 상대적 가치인데 따지느라 너무 고생하고, 구분하더라도 맞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또한 잘 구분했더라도 악을 없애기 위해서 악과 선을 다 없애야 한다. 선이 있으면 악이 생기므로 악을 제거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선이 있는 한 악은 없어지지 않는다. 악을 제거할 생각하지 않고 악을 포용한다. 자꾸 악인이라는 생각이 들면 악인은 도움을 받아 악에서 벗어나야 하는 제자일 뿐이므로 가여워하고 아끼며 잘 구원해 준다.

 

이 장에서 사람들은 즐거운데 자기만 왜 이런지 한탄을 묘사하는 글이 아니다. 노자를 늙은 할아버지로 생각하면 도덕경은 실감 나지 않는다. 노자는 득도한 사람이다. 분별에서 벗어나 근심이나 걱정이 없고, 마음의 평정을 얻은 사람에 대한 은유적 묘사다. 광채가 나고 뚜렷한 모습이 아니다. 분별에서 벗어나 외롭고 어벙해 보이며 희미한 모습이다.

 

전체 글의 줄거리는 이렇다.

'득도한 사람은 시비, 이해, 선악을 안 따진다.'

하나가 생기면 반대 성질도 저절로 생긴다. 이해, 시비와 선악을 따지는 학문을 끊는다. 공손하게 대답하든 불손하게 대답하든, 선이든 악이든 분별하여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한 편에서는 무례하다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통쾌하다고 말한다. 무례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신세를 진 사람이고, 통쾌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피해를 본 사람이다. 그 사람의 말에 무례나 통쾌나 그런 성질이 없다. 사람들이 자기 판단기준에 따라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선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 악한 일이 되어버린 경우 선한 행위인지 불분명하다.

 

사람들은 이해, 시비, 선악 등을 분별하여 비교하고 우열의 차이를 두어 피 터지게 싸운다. 근심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구분에 힘쓰는 경우 복잡해 골머리를 앓는다. 설령 구분하더라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뚜렷해져 차별과 애증의 번뇌가 커진다. 그 번뇌에 속박되어 고통스럽고, 그 고통을 두려워한다.

 

아(阿)는 아첨하다, 아부하다는 의미고, 아유(阿諛)는 환심을 사기 위해 알랑거림이나 그런 말이나 행동을 뜻한다. 아(阿)를 공손한 대답과 반대되는 의미로 새겨 불손한 대답으로 번역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人之所畏)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분별로 인해 발생하는 근심이나, 학문을 끊고 선악을 분별하지 않아 세상이 잘 안 돌아가거나 세상에 적응을 하지 못할 것 같은 근심 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득도한 사람은 외부 존재에 집착하지 않는다.'

외부 존재를 판단하지 않아 분별의 집착이나 감정의 집착에서 벗어난다. 담담하여 마치 자타를 구분 못하는 영아가 웃지 않아 무표정하고 세상 일에 무관심한 사람처럼 보인다. 분별을 끊어 근심이 없고 즐겁지도 않은 상태다. 내면은 밝으나 외면은 희미하고 어두워 보이는 모습이.

 

사람들은 외부 존재에 집착하여 마음을 빼앗기고 자기의 마음에 집중하지 못하고 흔들린다. 감각적 쾌락을 좇아 즐거워한다. 마치 소를 잡아 통째로 즐기면서 한 잔 걸치고, 봄날 누대에 오르는 것 같은 모습이다.

 

비록 꽃핀 경치가 있어도, 편안하고 초연하게 머문다(26장)라는 표현이 있었다. 편안하고 초연하게 머무는 사람은 외부 경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고요하다. 봄날에 누대에 오르는 것 같다는 말은 외부 경치에 마음을 빼앗겨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으로 해석했다.

 

'득도한 사람은 외로워 보인다.'

도는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독립의 특성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외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마치 너무 지치고 고달픈데 고향이나 가족들이 기다리는 곳이 없어 돌아갈 데 없고 홀로 남겨진 것처럼 외로워 보인다.

 

'득도한 사람은 바보 같이 보인다(대우大愚).'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않고 다 포용하는 사람이므로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워 보인다. 희미하고 답답해 보인다. 사람들은 배우고 익혀 이해시비를 분별하고 똑똑하게 산다. 무심한 나는 딱하고 답답한 사람 같다. 속인이 보기에 분별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바보 같아 사리에 밝지 못하고 희미하게 보인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 똑똑한 바보는 양기, 음기가 잘 뒤섞여 혼돈이라는 만물 탄생의 종자를 품은 존재다.

 

'득도한 사람은 고요하고 묘하다.'

도는 무성, 무형의 특성을 지닌다. 소리가 없으므로 바다처럼 고요하다. 형상이 없으므로 하늘 높이 부는 바람이 멈추지 않고 부는 것처럼 볼 수가 없으나 끝임 없이 영향을 미친다.

 

'득도한 사람은 초라해 보인다.'

바보 같은 나는 초라해 비천하고 미련해 보인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거나 뽐내지 않고, 나 홀로 남들이 존재감 없다고 무시하는 무와 덕을 귀중히 여긴다. 다른 사람이 힘이 있고 돈 많기를 바라는데 득도한 나는 만물을 낳고 덕을 베푸는 근원인 도를 귀하게 여긴다. 돌처럼 소박하게 사니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다. 내 것만을 챙기기도 바쁜 세상에 남을 먹이는 바보 같은 삶이다. 만물을 기르는 어미 같은 존재인 도가 그런 모습임을 알기 때문에 도를 따라 그렇게 산다.

 

분별에서 벗어나 깨달은 사람은 휘황찬란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희미하고 애매하다. 담담함(泊), 웃지 않는 영아(嬰兒之未孩), 돌아갈 곳 없음(無所歸), 홀로 남겨짐(獨若遺), 사리에 어두움(沌沌), 정신이 희미함(昏昏), 홀로 딱하고 답답함(我獨悶悶), 소리가 없는 고요한 바다(海), 형체를 알 수 없이 높이 부는 바람(飂), 둔하여 비천함(頑似鄙), 식모(食母)의 모습이다.

  


분별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생각한다. 앞면과 뒷면은 없다. 동전을 보는 사람에 따라 앞면이기도 하고, 뒷면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동전의 앞면과 뒷면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뻔히 보이는데 앞면과 뒷면이 없다고 말하면 거의 미친놈 취급을 당한다.

 

이런 사람에게 앞면과 뒷면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① 앞면과 뒷면은 그렇게 보이나 실상 앞면과 뒷면을 알 수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② 앞면과 뒷면은 서로 의존하고 있어 하나만 제거하거나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뒷면만을 제거할 수 없다. 설령 뒷면을 제거했더라도 또 다른 뒷면이 생긴다. ③ 앞면과 뒷면은 반전한다.

 

분별하지 않는다는 말을 분별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분별을 없애는 훈련보다 분별이 지니는 한계를 바로 아는 훈련이 세상을 는 사람에게 더 다가가기 쉬운 것 같다. 선악을 예로 들어 본다. ① 선과 악은 그렇게 보일 수 있으사실 선과 악을 알 수 없다. ② 선과 악은 서로 의존하고 있어 악만 제거하거나 선을 악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③ 선과 악은 반전한다.

 

도는 마음을 비워서 얻고, 지혜는 오감, 지각, 의욕, 의식을 통해 얻는다. 도를 닦는 방법과 지혜를 얻는 방법은 반대다. 학문을 닦을 때 이해, 시비, 선악 등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정신적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한다. 반면 도를 닦을 때 오감을 무디게 하여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나고, 지식, 의지와 욕구, 선악 등을 분별하는 의식에 집착하지 않는 수행을 한다. 도는 잘 분별하고 똑똑해야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득도한 사람은 이해, 시비, 선악 등에 대해 분별하는데 집착하지 않고 다 포용하며 상호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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