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가 초등학교 때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놀라운 게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옛날에 이런 사건이 있었다. 어떤 미국 사람이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후 한마디도 못 하던 중국어를 유창하게 했다. 그렇다면 사람의 유전자에 성격이나 특징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말 소름 끼친다.
사람에 대해 궁금한 점을 다 풀지 못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내가 정확하게 아는 사실은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단지 깨우치지 못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에 낙담할 필요가 없다. 깨우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살면 된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은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초기 불교는 불보살만 성불할 수 있다고 했으나, 그 후 중생도 수행이라는 후천적 노력에 의해 성불할 수 있다고 했다.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은 본래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를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고려 중기 승려 지눌은 더 파격적인 주장을 했다. 중생은 이미 구원되어 있기 때문에 꼭 성현들에게 용서해 달라고 빌거나 위대한 경전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 자체도 이미 선천적으로 완성되어 있다. 즉,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근원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지눌은 《수심결(修心訣)》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 몸에 있는데, 다만 네가 못 볼 뿐이다. 너는 하루 내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알고 춥고 뜨거운 것을 알고, 기뻐하기도 하고 성질내지 않느냐! 그게 바로 ‘그것’이다.”
“누구나 숨 쉬고 느끼고 생각하며, 활동하고 살지 않는가? 그 작용(作用), 바로 그것이 위대한 기적이고 우주의 선물이다! 그것 자체가 이미 축복이고, 또한 전부이니 그 안을 뒤집어보거나, 그 밖을 기웃거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그렇다면 왜 중생들에게서 부처와 같은 불성이 보이지 않는가? 불교는 이렇게 설명한다. 거울을 닦지 않으면 먼지가 끼어 사물을 제대로 비출 수 없다. 마찬가지로 마음이라는 거울에 먼지가 끼면 상이 왜곡되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분별심과 자의식이라는 먼지가 시도 때도 없이 마음에 낀다. 매일 마음의 먼지를 닦는 수도가 필요하다.
지눌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외부 사물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외부 사물을 자신의 손익에 따라 판단하고 아군과 적군으로 나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작용이 오염되어 있다. 인류의 오랜 습관 때문에 깨달았다고 먼지는 한꺼번에 없어지지 않는다.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닦아야 한다.”
지눌은 수도 시 돌로 풀을 눌러 놓듯이 억압하지는 말라고 했다. “선이든 악이든, 그동안의 반응이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그저 ‘관찰’하기만 하라. 판단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정신의 풍경에 무엇이 오가는지를 그저 바라보는 것, 그것 하나면 된다고 장담한다. 어지러운 상념들이 가라앉고, 거친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생각이 날카로움을 잃고 길들여진다. 사물을 보는 직관이 커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스러워진다.
이런 훈련을 지속하면 미세한 상념의 흐름들까지 잡힌다. 외부 사물을 보고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생각들이 저절로 자취를 감춘다. 사물의 영향력이 감소되는 그만큼, 자신의 본래 힘이 스스로의 빛과 힘을 발산하게 된다.”(자료원: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9.18., 휴머니스트)
마음의 작용은 몸으로 나타난다. 몸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신성을 만나는 길이다. 사람은 누구나 신성을 가지므로 신을 바라보듯이 나를 보고 남을 본다.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은 경외심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