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 숙성된 느슨함

by 누룽지조아

아내가 큰애 책장을 정리했다. 학년별, 과목별, 분야별, 시리즈물은 순번별로 책을 가지런히 꽂았다. 자주 찾는 책은 찾기 쉬운 곳에 놓았다. 희한하게 책장에 책을 다 꽂지 않았다. 한 20~30%를 비워 놓았다. 내가 그곳에 몇 권 더 꽂으라고 말했다.


아내는 "일부러 여유 공간을 남겨 놓아. 다 채우면 많이 넣고 보기 좋지만, 꺼낼 때나 다시 넣을 때 힘들어. 가끔 책을 읽기 위해 정리하는지, 보여 주기 위해 정리할 책이 필요한지 헷갈려. 가득 채워 보여 주기 위해 정리하는 경우 주객전도의 느낌이 들어. 꽉 채우는 거에 죄책감도 들고."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좋은 생각이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도 청산과 관련 업무가 끝나지 않아 증빙 등 서류 뭉치를 사무실에 잔뜩 쌓아 놓은 적이 있었다. 먼지가 쌓였다. 공기가 들락날락할 공간이 없어 쾌쾌한 냄새가 났다. 책은 많은데 이리저리 꽂혀 있어 뭐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 이미 산 책을 또 사기도 했다.


여유 공간을 남겨 놓는 아내의 책장 정리는 책의 있음과 빈 공간의 없음이 조화를 이룬다. 있음과 없음을 한 바구니에 담는 수양과 비슷했다.


느슨함, 바보 등을 강조하는 것에 거부감이나 이상한 느낌이 들 수 있다. 철저함, 총명함 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반대되는 가치를 강조할까?


대립된 두 가치의 균형과 공존을 강조하는 말이다. 상황이나 자기 위치에 따라 어떤 가치는 숨고 어떤 가치는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사회는 튀고 존재감 있는 양만 강조하고 음을 무시한다. 사람들도 튀는 것을 좋아하고, 묻히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문제는 튀는 것만 좋아해서 튀는 행동만 하면 결국 튀지 못하고 견제만 받는다. 튀지 않아 소홀히 해 묻혀 있는 음의 가치를 제자리로 되돌리고 싶다. 반대되는 두 가치가 공존하는데 하나의 가치가 완벽할 수 없다. 두 가지 가치를 다 포용하고 상황에 따라, 자기 위치에 따라, 상대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나오게 한다.


빡빡함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빡빡한 경우 자기를 괴롭히고 남을 못살게 군다. 원칙은 느슨하게 정하고, 정한 원칙은 지킨다. 법, 규정 등이 없어도 문제이지만 너무 많으면 더 큰 문제이다. 지켜야 할 법 등이 너무 많아 이해하기도 어렵고 지킬 수 없다. 큰 도둑은 다 빠져나가고 좀도둑만 잡는다.


숙성된 느슨함을 가진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숙성된 느슨함을 가진 사람은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자기를 꽉 조이지 않고 힘을 뺀다. 힘이 빠져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스트레스가 적고,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는다. 남의 힘든 일도 스트레스받지 않고 들어줄 수 있다. 겉보기에 힘을 꽉 주어야 할 순간에 집중하지 않아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 같다.


‘숙성된 느슨함을 가진 사람은 잘 포용한다.’ 남을 꽉 조이지 않는다. 남에게 관대하다. 중요하지 않은 작은 단점을 용인해 주므로 남을 잘 포용하고 구성원의 반발이 적다. 남도 잘 협력한다. 겉보기에 관계가 느슨해 깊게 사귀는 사람이 많지 않은 사람, 까다롭지 않아 만만한 사람 같다.


‘숙성된 느슨함을 가진 사람은 여유가 있다.’ 꽉 채우지 않아 숨 막히지 않는다. 너무 바쁘지 않아 한 번 더 생각하고 큰 그림을 볼 여유가 있다. 여유가 있어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겉보기에 헐렁하고, 유유자적하고, 하는 일 없는 사람 같다. 한 번 더 생각하기에 우유부단하고 너무 신중한 사람으로 보인다.


‘숙성된 느슨함을 가진 사람은 일을 길게 할 수 있다.’ 무리하지 않아 장기간 즐겁게 한 걸음씩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다. 겉보기에 한계까지 자기를 몰아붙이지 않아 한계를 깨지 못하거나 열정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사람 같다.


숙성된 느슨함은 느슨함만 있는 느슨함이 아니다. 느슨함만 있으면 집중하지 않고 우유부단하며, 열정적으로 도전하지 않는다. 숙성된 느슨함은 느슨함 속에 집중과 철저함을 감추고 있다. 나사를 쪼여야 할 때는 꽉 죈다.


결정적인 순간은 짧고, 기다려야 할 기간은 길다. 숙성된 느슨함은 결정적인 순간에 집중하고, 기다려야 할 기간에 느슨하고 편하게 있는다. 시간이 흘러 돌이켜 보면 결과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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