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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heera Aug 18. 2019

08 : 닦아낸 먼지

연애 에세이 : 그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너의 색이 번지고 물들어


08 : 닦아낸 먼지

연애 에세이 : 그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             



  

 편식하는 사람들 중에는 먹어보지도 않고 맛없다고 생각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내가 그랬다. 고기와 햄이 없으면 밥 먹을 줄 몰랐고 이상하게 보이는 음식은 먹지 않았다. 한 번만 먹어보라는 가족의 권유도 뿌리쳤다. 그래도 언제였나, 무 무침 반찬을 먹어보라고 해서 한 번 먹어봤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진짜 맛이 없었다. 그때가 아마 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30대가 되니 입맛도 조금씩 변한지라 식탁 위에 올려진 무 무침을 보고 도전할 마음이 생겼다. 당연히 이번엔 아무도 권유하지 않았다. 젓가락을 움직였다. 무 무침 두 가닥을 집어 올렸다. 젓가락에 걸린 두 가닥을 잠시 쳐다보다 입안으로 투척했다. 엇, 이상하다. 참 희한하게도 맛있었다. 그땐 그렇게 맛없었는데.     

 가능성의 문이 열렸다. 그에게서 답변이 왔다. 몇 번의 문자를 주고받은 뒤 데이트 장소를 정했다. 그는 우리 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있었다. 나에게도 건강한 두 다리가 있는데 이 남자는 매번 데려다주고 데리러 온다고 한다. 차 있는 남자를 처음 만나보는 것은 아니어도 만날 때마다 이러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만날 장소를 따로 정하려 했지만, 우리가 갈 곳이 대중교통으로 가기 불편한 곳이라 데리러 온다고 했다. 그래, 만나다 보면 이러다 말겠거니 라는 생각에 그냥 그렇게 하자고 했다.     


 우리는 찾아가기 불편하다는 레스토랑에 들러 식사했다. 그곳은 그가 친구와 함께 맛있게 먹었다던 브런치를 파는 곳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여자 사람 친구이지 여자 친구는 아니라며 혼자 민망해했다. 어디가 가고 싶냐고 묻기에 나는 아쿠아리움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가까운 제2 롯데월드에 있는 아쿠아리움으로 갔다. 관람 전 아이스크림도 먹고 같이 웃고 장난치며 재잘거렸다. 아쿠아리움을 좋아하는 나는 구경할 마음에 한껏 신났다. 입장을 하고 관람을 했다. 거기서 고래 벨루가를 만났다. 동영상도 찍고 그가 사진도 찍어줬다. 신나는 마음이 더 즐거워졌다.      


 하루가 다 지날 때쯤 대학로에 있는 한 술집에 들렀다. 소주 한잔을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난 궁금한 것이 있었다. 여태 내가 경험한 남자들은 자신이 먼저 여성을 좋아하면 자주 연락하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밥은 먹었는지, 주말에는 뭐 하는지 등의 안부들. 솔직히 모두가 그랬다. 그런데 그는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알려주면서 만난 후로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만나기로 한날과 그 전날만 연락했다. 주고받는 물음도 답변도 간결했다. 내일 뭐 하고 싶어요? 몇 시까지 갈게요. 세 네 번 주고받으면 연락은 끝이 났다. 내 딴엔 매력을 잘 못 느꼈으면 정이라도 들어야 하는데 연락도 잘 없으니 정도 안 들고 그의 마음에 대해 긴가민가했었다.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배려라고 했다. 귀찮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고 했다.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아니, 경험에서 오는 생각이 다르다. 어쩌면 나이 차이에서 오는 연애 방식의 다름일 수도 있었다. 또는 그 나이 때 남자들의 특징일 수도 있었고 나에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그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말만은 마음에 들었다. 바쁠 것 같아서, 아직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조심스러워서, 문자보다 전화를 좋아해서, 이 외의 또 다른 말들이 아닌 그 말은 나에게 이렇게 들렸다. 당신의 생활을 존중해요.     


 낯 설은 그의 모습이 익숙함으로 바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다시 만나게 되어 좋았다. 생각을 바꾸니 그 사람이 보였다. 내면을 바라보니 그 사람이 다가왔다. 나를 만나서 좋아하는 모습. 마주 보며 부끄러워하는 모습. 묻지도 않은 말을 알아서 얘기하는 솔직한 모습. 세심하진 않지만 챙겨주는 모습. 꾸밈없는 말과 꾸밈없는 눈빛까지. 모두다. 만나 보니 느꼈다. 그를 바라보는 건 먼지 쌓인 거울을 닦아 낸 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제야 진정으로 그 사람을 볼 준비가 되었다.               




<너의 색이 번지고 물들어> 출간된 에세이 책을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랑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토대로 자아와 인생의 성찰을 보여주는 인문학적인 사랑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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