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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Aug 19. 2023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한 가지는?

오펜하이머, 덩케르크, 화양연화 스포 포함

  미장센이 뛰어난 영화라고 하면 언제나 거론되는 영화가 있다. 바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다. 화양연화는 서로 옆집에 사는 양조위와 장만옥이 그들의 배우자끼리 바람을 피우는 것을 눈치채곤 둘이서 그들의 바람을 상상하고 연기하며 자신들도 바람을 피우는 내용의 영화다. 주인공들의 심리를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영화 속에서 그들은 계속해서 답답한 구도로만 보여지고 늘 어딘가에 가려져있거나 어딘가에 끼어있는 모습으로만 연출된다. 그리고 늘 단정한 모습을 하도록 하여 그들이 주변의 시선과 관념에 맞춰 사는 성격인 것을 나타내고 극단적인 색의 대비를 통해 아찔함을 강조한다. 거기에 더해 불과 몇 년 사이에 이웃에게 관심이 없어지는 사회의 변화까지도 은근히 표현한다. 영화에서 결국 그들의 마음은 깊어지지만 결국에 그들은 선을 넘지 못한다. 기껏해야 방 안에 갇혀서 손을 잡고 잠을 청하는 게 스킨십의 전부다. 육체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교류를 통한 불륜과 그러면서도 선을 넘지 못하는 그들의 심정을 아름답게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미리 이별 연습을 해 봅시다." … "울지 말아요. 연습인데."


 이 영화는 영화의 완성도와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내 개인적으로는 그리 좋은 평을 내리진 않았던 영화다. 그 당시 내가 영화를 평가함에 있어서 제일 중요로 여기는 것이 바로 어떤 줄거리를 갖고 있는지와 얼마만큼 나에게 생각할 거리와 여운을 남기는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저 각자 배우자들의 불륜의 행보를 따라가다가 썸을 타고, 결국에는 썸만 타다가 헤어지는 그런 밋밋한 줄거리의 화양연화에는 좋은 평을 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 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다시 평을 내릴만한 계기가 생겼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튜브에서 누군가 했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영상이라고. 그거 줄거리만 있고 시놉시스만 있다면 그건 그냥 책일 뿐이라고. 그래서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했느냐가 제일 중요하고 그것이 거의 전부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꽤나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줄거리만이 중요하다면 그의 말대로 그저 재밌는 책을 읽으면 그만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찾는 것은 결국 나 스스로도 좋은 줄거리를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했는지를 궁금해해서이고 거기서 여러 가지 재미와 감동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몇 년 전에 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가 떠올랐다. 



  나는 역사를 기반으로 한 영화나 전쟁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줄거리를 중시하는 나에게는, 세세한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 되고 어떻게 끝날지 역사책에 다 쓰여있기 때문에 딱히 흥미를 느낄만한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덩케르크가 개봉했을 당시에는 때마침 휴직 중이었기에 시간이 많이 남는 편이었다. 따라서 휴직의 이점을 한껏 느끼기 위해 사람들이 보기 힘든 평일 대낮에 IMAX로 영화를 보려 했고, 그때 IMAX로 볼 수 있는 영화는 덩케르크뿐이었다. 딱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시간이나 때우자는 마음으로 영화관으로 향했다가, 생각이상으로 많은 충격을 느끼고 영화관을 나왔었다.

  덩케르크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연합군을 구출하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줄거리는 어차피 역사대로 흘러가기 마련이었지만, 놀란 감독은 이 단순한 플롯을 영상과 연출과 소리의 힘으로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3가지 시간대를 뒤섞어서 편집하고 엔진소리와 총소리로 사람을 압도하며 3시간을 채웠고, 덕분에 나는 영화가 끝났을 때 마치 내가 전쟁터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제야 나는 영화라는 것이 줄거리가 엄청 뛰어나거나 새롭지 않더라도 만들기에 따라서 관객들에게 충격적인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출처 : 다음 웹툰 부기영화


  그리고 오늘 본 영화 오펜하이머도 덩케르크와 마찬가지의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히 오펜하이머의 전기이긴 하지만 이를 덩케르크처럼 3가지 시간대를 엮어서 연출하고 압도적인 사운드로 계속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등장인물들을 많이 등장시키고 그들의 생각과 갈등을 계속해서 보여줌으로써, 핵분열에서의 연쇄반응뿐만 아니라 사람들 간의 연쇄반응, 그리고 원자폭탄 개발로 시작된 핵군비 경쟁의 연쇄반응을 표현해 내었다. 


"알버트, 제가 예전에 한 계산 기억나요? 파괴의 연쇄말이에요…. 시작된 거 같아요."


  이처럼 줄거리보다는 영상과 연출의 힘이 대단한 영화였기에, 영화를 먼저 본 지인분이 말씀하신 '너무 재밌게 봤는데, 다 보고 나면 내용이 별게 없는 것 같더라구요.'라는 평이 어찌 보면 정확한 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과거의 나와는 다르게 영화는 줄거리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후, 꽤나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설 수 있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화양연화-덩케르크-오펜하이머로 넘어갈수록 내 생각이 바뀌어가는 게 재밌기도 하고 덕분에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묘한 안도감 마저 든다. 앞으로도 계속 내 생각이 어떻게 바뀌어 가고 그로 인해 어떤 새로운 것들을 느끼게 될지 약간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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