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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Sep 22. 2023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건 물만은 아냐

  얼마 전 회사에서 대표이사가 전 직원을 대상으로 메일을 보냈다. AI를 업무에 적용시킬 방안을 1인당 2개씩 작성하라는 내용이었다. 메일을 보자마자 한숨이 푹 나왔다. 주기적으로 같은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야 작성하기 용이하겠지만, 나처럼 매번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부서에 속한 사람들은 방안을 내놓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부서는 고려하지 않고 그냥 무지성으로 전체에게 과제를 할당한 것이었다. 불과 4년 전에도 다른 대표이사가 똑같이 전 직원에게 RPA(Robotic Process Automation : 비즈니스 프로세스를 자동화해 주는 도구)를 통해 업무 효율을 높일 방안을 1가지씩 내놓으라고 했었다. 시간이 흐르고 기술이 발전해서 RPA의 위치를 AI가 가져갔을 뿐, 일하는 방식은 여전히 9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회사에서는 주기적으로 조직 문화에 대한 평가를 실시한다. 부서에서 일하면서 힘든 점이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부서원 전체를 대상으로 조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평가의 문제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첫 번째로는 상급자에 대한 불만이나 건의 사항은 '부서장' 대상으로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부서장 보다 윗 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부서장 레벨에서 해결이 불가능한 고충은 작성할 수가 없다. 두 번째로 이 평가가 좋지 않으면 부서차원에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안을 제출해야 하는데 이를 부서원들에게 떠넘기는 부서가 꽤 많다는 것이다. 최소한 부서장이 아이디어를 내고 방안을 실행해서 부서원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는 시늉조차도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 평가 제도는 취지야 좋았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이름뿐인 유명무실한 제도가 되었다. 회사를 좀 다닌 사람들이라면 이 사실을 알기에 평가에 잘 응하지 않는다. 그러면 또 응답률이 낮다며 빨리 다 평가를 하라고 윗선에서 지시가 내려온다. 결국 사람들은 귀찮아서 그냥 다 '보통' 또는 '좋음'을 후다닥 찍어버리고 넘긴다. 그러면 자연히 평가 점수는 올라가고 윗 선에서는 "음, 잘 개선되고 있군!"이라며 좋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반복적으로 벌어진다.


심지어 겉도 그럴듯하지 않아.


  유튜브로 알쓸별잡을 보는데 이동진 평론가와 장항준 감독이 영화 기생충 촬영지를 다녀오고선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왔다. 기생충에서 비가 많이 내릴 때 송강호네 가족이 집을 향해 내려가던 기다란 계단에 대한 얘기였다. 이동진 평론가는 잘 사는 이선균네 가족은 높은 곳에 살고 못 사는 송강호네 가족은 반지하에서 사는 걸로 계급 사회를 표현했다 말하면서 물에 대한 얘기도 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속성이 있는데, 계급 사회에서의 소통도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그래서 이선균은 운전기사인 송강호에게 말도 보내고 시선도 보내고 할 수 있지만, 운전기사인 송강호가 이선균에게 보낼 수 있는 건 정작 자신이 감추고 싶어 하는 냄새뿐이라고.



  이 얘기를 듣다 보니 요즘의 회사 생활이 떠올랐다. 예나 지금이나 소통을 강조하고 중요시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안쪽을 들여다보면 회사 내에서의 소통도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 자꾸 위에서는 뭔가 개선안을 찾으라 하고 아이디어를 내놓으라 하지만 정작 유의미한 개선안과 아이디어는 중간 관리자에게 막혀 절대로 위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짜로 소통할 마음이 았다면 중간을 거치지 않고 위에서 직접 내려와 고충을 듣고 아이디어를 들으면 되겠으나, 그러지 않는 것을 볼 때 이 모든 건 다 시늉이고 절대로 소통할 마음은 없어 보인다.

  가뜩이나 기술의 변화를 주도하지도 못하는 회사가 소통마저도 90년대에 머물러있어서 변화를 따라가지도 못하는 꼴을 보자면 정말 한숨만 나온다. '지난 10년간 아무것도 바뀐 게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이제는 마음도 떠나기 시작한다. 아마 정말 회사를 떠날 때가 된 거긴 한가 보다.


  물도 소통도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만 하니
위는 청정해 보여도
아래에서는 고여서 썩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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