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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Oct 04. 2023

P라서 계획이 없는 게 아냐

  최근에 가족여행을 준비하면서 계획을 세우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 극 J성향인 나로서는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대부분의 계획을 가족들의 도움 없이 거의 나 혼자 세워야 했다. 동생에게도 이런저런 것들을 시켰지만 결국 동생도 거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준비를 하며 '우리 집에서 J는 나뿐이고 다들 P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P와 J의 차이 때문은 아닐 거라고.



  예전에 극 P성향인 친구와 등산을 간 적이 있었다. 평소 나는 등산을 너무나도 싫어하는데 이 친구는 매주 산에 가고 싶어 할 정도로 굉장히 등산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이 친구는 어떻게든 나에게 등산의 맛을 보여주고 싶은 나머지 이런저런 딜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 어떤 딜에도 나는 요지부동으로 등산을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이 친구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 결국에 나는 '그래 저렇게 같이 가고 싶어 하는데 한번 가자.'라는 마음으로 승낙을 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자기가 모든 계획을 다 짜올 테니 나 보고는 개인적인 물품만 챙겨서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등산 당일, 청계산을 오르기 위해 신분당선 청계산 입구 역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개찰구 앞에서 그 친구와 인사를 하고 발길을 옮겼다. 그러자 그 친구는 잠깐 기다려보라며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지도 어플을 켜서 몇 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 찾았다. 1분여를 찾고서는 같이 지하철역 출구를 나섰다. 그러자 그 친구는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다시 지도 어플을 켜서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다음에서야 같이 산 입구를 향했다. 하지만 그 뒤 산 입구로 향하는 도중에도 몇 차례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그 친구는 지도 어플을 켜서 길을 찾아야 했고 덕분에 둘은 생각 이상으로 길을 헤맸다.

  30여분이 지나 드디어 산 입구에 도착해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에 오르면서 내가 물었다.

  "아니, 니가 다 계획을 짜온다더니 왤케 헤매?"

  "나도 처음 오니까 그렇지."

  "그럼 더더욱 잘 찾아봤어야 하는 거 아냐? 어떻게 지하철 출구도 안 알아보고 갈림길마다 서서 길을 찾아? 최소한 몇 번 출구 쪽인지랑 대략적인 경로 정도는 미리 알아놨어야지."

  "아우 잘 왔으면 됐잖아."

  "그럼, 이다음 계획은 뭐야? 얼마나 계획을 세워왔나 들어나 보자."

  그러자 그 친구는 자신 있게 말했다.

  "2시간 동안 올라갔다가 반대편으로 내려가서 거기에 내가 찾아놓은 고깃집에서 막걸리 한잔 하는 거지."

  그렇게까지 썩 마음에 드는 계획은 아니었지만 설마 무슨 일이 있겠냐 싶어서 더 이상 잔소리는 하지 않고 그 친구를 따라 산에 올랐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나 반대편으로 내려온 다음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그 친구는 또 지도 어플을 켜서 그 가게의 위치를 열심히 찾았다. 더 뭐라 잔소리할 기운도 없던 나는, 잔소리는 포기하고 가게 이름을 물어본 다음 직접 지도 어플에서 가게를 찾았다.

  "야, 거기 오늘 영업 안 한다고 써있는데?"

  그러자 그 친구는 당황한 듯 말했다.

  "어? 아냐, 할걸? 오픈 시간이 안된 거 아닐까?"

  "하긴 뭘 해. 일요일 휴무라고 써있네. 아오."

  결국에는 그 가게 대신에 부랴부랴 다른 가게를 찾아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다음부터 그 친구는 나에게 등산을 가자고 다시는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친구와 등산을 갔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P와 J의 차이는 아마도 계획을 세우긴 세우되 그 계획의 퀄리티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가족들이 가족 여행을 위해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손 놓고 있는 것은 P와 J의 차이 그 이전의 문제가 아닐까 했다. 왜냐면 극 P인 친구도 허술하게나마 계획을 세워오긴 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계획을 잘 세우고 잘 못 세우고는
J와 P의 차이지만,
계획을 세우고 안 세우고는
결국 성의의 문제다.


  이제 가족여행은 안 가는 걸로.


늙는다 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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