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제 어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일단 어른이란 무엇인지부터 명확하게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 한창 유명해진 과학 유튜버 '궤도'가 어떤 얘기를 할 때마다 "~의 정의란 무엇일까요?"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위키백과에서는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 하고 한국 법률에서는 '만 19세 이상'이라 하며 심리학에서는 '사춘기가 지난 이후'를 어른이라고 정의한다. 이처럼 분야마다 또는 사람들마다 어른에 대해 내리는 정의는 각양각색이다. 아마 지금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어떤 사람을 어른이라고 하냐고 물어보면 사람마다 제각기 생각하는 바를 얘기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누가 나에게 어른의 정의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아마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어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할 듯하다.
그럼 인격적으로 완성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 나는 유아기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희로애락을 느끼고 분명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것을 인격적으로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유아기적 사고방식은 바로 남들도 나와 같아야 한다는 혹은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모든 유아들은 태어났을 때 좁은 세상을 갖고 태어난다. 유아에게 이 세상에 사람이라 함은 오로지 엄마와 아빠뿐이고 세상이라는 공간은 기껏해야 엄마의 품속 혹은 집안 정도다. 그래서 유아는 세상이 본인 위주로 움직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이로 인해 걷고 말하고 자라면서 세상이 확장되더라도 일정 나이까지는 세상을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자라 인격적으로 성숙해지면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세상은 본인을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며 내가 아닌 다른 인격체들도 존중받아야 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하지만 유아기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란 후에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자신과 다른 의견을 보면 악플을 달기도 하고 인신공격을 하기도 하며 어디 가서 진상짓 혹은 갑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한국 법률상 어른이긴 하지만 내 기준에는 어른이 아닌 것이다.
희로애락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어떤 한 감정에 치우치거나 감정이 모자란 사람은 사회에서 살아가기에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남들이 웃을 때 같이 웃지도 못하고 남들이 울 때 같이 울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남들이 내가 갖지 않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표현하면 그에 대해 잘못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감정적으로 성숙해지고 잘 표현할 줄 알게 되는 것도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소가 아닐까 싶다.
나는 어릴 때부터 희로애락 중에 애(哀)와 락(樂) 감정이 많이 결여된 사람이었다. 아무리 슬픈 것을 보더라도 울거나 슬퍼하지도 않았고 즐거운 일을 겪어도 그저 무표정하게 마음속으로 '재밌네'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초등학생 때 한창 '아버지'라는 소설과 '가시고기'라는 소설이 광풍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둘 다 애절한 부성애를 잘 표현한 소설로써, 베스트셀러가 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평소에 책을 잘 읽지 않는 어머니도 사 올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소설을 보고 펑펑 울던 어머니는 읽어보라며 나에게도 책을 건네주었었다. 책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잘 읽던 나는 당연히 그 책들을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어땠어?"라고 물어보셨고 내 대답은 "그냥 그렇던데."였다. 그런 나를 보며 어머니는 '눈물도 없는 놈'이라며 손사래를 치셨었다.
또 어느 날은 용인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에 가족끼리 나들이를 간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놀이기구들보단 사파리에 가서 곰과 호랑이를 너무 보고 싶어 하셨기에 가족 모두 사파리에 가서 버스를 타고 곰과 호랑이를 구경했다. 그때는 아직 버스 기사 아저씨가 건빵을 던져주면 그 건빵을 받아먹기 위해 곰들이 이런저런 재주를 보여주고는 했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너무 재밌어하셨었다. 하지만 정작 어린아이였던 나는 '곰 따위가 건빵 받아먹는 게 뭔 재미람.'이라고 냉소적으로 생각하며 시큰둥하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스무 살이 넘어도 여전히 미성숙한 상태였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을 사귀는 것이 많이 어려워졌다.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감정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상처가 되는 말을 한다거나 내가 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상대방의 입장이 아닌 오로지 내 기준만으로 판단하곤 했다. 유아기적인 생각을 벗어나지도 못한 것이고 감정적으로도 성숙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무렵, 회사에 입사를 했고 입사 동기들과 같이 하루 휴가를 내어 에버랜드에 방문하게 되었다. 모든 놀이기구를 타고 즐기기 위해 계획적으로 코스를 짰고, 그 코스의 마지막에는 사파리가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사파리에 들어가서 똑같이 건빵을 받아먹으려 재주를 부리는 곰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어릴 때와는 다르게 그때는 진심으로 재밌기도 하고 곰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귀여워서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때야 비로소 나에게 희로애락 중 락(樂)이 생겼음을 알았다.
다시 몇 년 뒤에 회사에서 휴직하고 쉬고 있을 무렵에는 스터디 사람들과 영화를 보러 갔었다. '신과 함께'라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 극장 앞에서 팝콘을 사며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중 한 동생이 나에게 이 영화가 엄청 슬퍼서 사람들이 많이 울었다는 글을 보았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자신만만하게 "나는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운 적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리고선 영화가 끝났을 때, 내 얼굴은 눈물과 눈물자국으로 얼룩덜룩했고 눈은 퉁퉁 부어있었으며 코는 꽉 막혀서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스터디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울지 않는다더니 이게 무슨 일이냐며 놀려대었다. 그렇게 그날 나에게 애(哀)가 생겼음을 느꼈고 그제야 나 스스로 '이제 사람다운 사람이 되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바로 그날 이후로 나는 여러 가지 감정에 대한 표현이 조금은 자연스러워졌고, 사람들의 감정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다. 덕분에 완전히 수월하지는 않더라도 예전보다 사람들을 사귀는 것이 살짝은 쉬워졌다. 그래서 이제 나는 누가 나에게 '어른'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어른이란 인격적으로 완성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좀 더 쉽게는 '솔직하게 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르면 나는 최근에서야 드디어 어른이 된 것 같다고도.
덧 : 저 날 이후로 눈에 무슨 수도꼭지가 달렸는지, 요새는 오히려 눈물이 주체가 안된다. (부작용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