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번호를 보니 아무래도 본사에서 걸려온 전화인듯했다. 때마침 원격으로 회사 포털에 접속해 있었어서 바로 전화번호를 검색해 보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니라 전사 인사팀 사람이었다. 전사 인사팀에서 나에게 전화할 일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일단 사무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People팀 ㅇㅇㅇ라고 합니다. 김제호 프로님 맞으시죠?"
"네."
"네, 다름이 아니라 다다음주에 회장님 추모 음악회가 열리는데 김제호 프로님께서 참석해 주실 수 있는지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저… 요? 왜… 요…?"
"상반기 우수 CA로 선정되셔서요."
우리 회사에는 CA(Change Agent)라는 제도가 있다. CA는 자기가 속한 부서의 조직문화를 바꾸거나 이끌고, 부서원들의 고충을 부서장이나 인사팀에 전달해 주는 역할을 맡는다. 우리 부서에서는 내가 2년째 CA 역할을 맡고 있는데, 운이 좋게도 올 상반기에 사업부 우수 CA로 선정이 되었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것과 음악회 참석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잠깐의 뇌정지가 와서 할 말을 잃고 조용해졌다. 그러자 인사팀 사람이 말했다.
"혹시 일정상 문제가 있으실까요? 날짜는 10월 19일입니다."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저보다는 부서장님과 PM(Project Manager)님이 허락을 해주셔야 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게, 음악회는 퇴근 이후인 저녁 7시부터 시작이에요."
그 얘기를 들은 나는 생각했다.
아니 이 자식들이
하면 뭐 얼마나 대단한 음악회를 한다고
퇴근 후의 황금 같은 내 개인 시간을 뺏어?
…
…
…
궁금한걸?
그렇게 나는 음악회 참석을 승낙했다.
19일에 조금 일찍 퇴근해서 본사로 향했다. 회사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공연장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나를 포함해 약 20명 정도가 버스에 올라탔다. 그렇게 버스는 1시간 30분여를 달려서 공연장에 도착했다. 신분증을 제출해서 신원을 확인하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해 부지 내부로 입장했다. 공연장 건물로 들어가 사전에 발급받은 QR코드를 통해 좌석을 확인하러 갔다. 좌석을 확인하기 위한 키오스크로 향하던 중 복도에 붙어있는 사진들을 통해 처음으로 어떤 공연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 음악회가 클래식 음악회이며 마지막에 한국인 최초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클알못인 나인지라도 조성진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조금은 흥분되기 시작했다.
사실 예전에도 종종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심지어는 유튜브를 통해 해 알게 된 연주자들의 연주를 실제로 보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티켓팅에 도전해서 롯데콘서트홀에 공연을 보러 간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김없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래서 혹여 이번에도 졸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래서 내가 왜 클래식만 들으면 지루해하고 졸린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클래식은 나에게 기승전결과 반복이 애매모호한 음악이다. 어딘가의 강좌나 설명을 보다 보면 보통 클래식 악보를 보면서 그 부분의 감정이나 느낌 같은 걸 설명해주곤 한다. 여기서는 감정의 고조가 일어났으며 여기서는 해소가 되었고 여기서 전율을 표현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내용들이 딱히 나에게는 와닿지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대중음악을 많이 들어서인지 나에게는 대중음악처럼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으면 그저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격해졌다가 잔잔해지는 것으로만 들렸다. 가사라도 있다면 가사의 내용으로 기승전결을 이해해보기라도 할 텐데 악기로만 진행되는 클래식은 나에게는 그저 많이 난해할 뿐이었다. 하다못해 그 곡에 얽힌 사연이라도 찾아보고 이해하려 해 보았지만, 딱히 그 사연들이 와닿지도 않았고, 사연을 알고 곡을 듣는다 한들 그 곡에 사연이 잘 녹아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힘들었다. 차라리 곡에 반복이라도 명확하게 들어있다면 그 반복을 통해 리듬감과 나름의 기승전결을 찾을 텐데 대부분의 클래식들은 명확한 반복이 없거나 반복이 있다고 한들 그 타이밍을 예상하기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불규칙성은 신기하게도 나에게 예상밖의 즐거움보다는 오히려 다음 진행이 기대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로 다가왔다.
요약하자면 기승전결도 모르겠고, 다음 진행이 기대되지도 않으며, 가사도 없고, 사연도 딱히 녹아있지 않은, 그저 음들을 나열하기만 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나에게는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저런 부분 중 몇 부분이라도 해소가 된다면 그런 종류의 클래식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들은 대부분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에 삽입되어 좋아하게 된 곡들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나오는 쇼팽 에튀드 No.5, 일명 흑건, 드라마 '한니발'에 나오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Goldberg Variations), 애니메이션 '4월은 너의 거짓말'에 나오는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 (라흐마니노프 편곡 버전) 등이 있다.
이처럼 클래식을 잘 알지도 못하는 완전 속세적이면서 대중적인 귀를 가진 나에게는 조성진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알고 있음에도, 그 연주가 지루하게만 느껴져서 졸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이왕 음악회에 온 것이니 나름의 교양을 쌓는 셈으로 치고 잘 듣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음악회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비올라 연주였다. 피아노 반주자와 함께 세 곡 정도를 연주했다. 비올라의 특성상 소리가 매우 편안하게 들렸다. 덕분에 시작부터 졸게 되지 않을까 많은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버스를 타고 오면서 충분히 잠을 자서인지 졸지는 않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순서는 현악 사중주였다. 드보르자크의 '아메리칸'이라는 곡을 4악장까지 전부 연주했다. 다행히도 드보르자크는 나에게는 조금 덜 부담스러운 작곡가였기에 나름 괜찮게 들을 수 있었다. 합이라도 미리 맞춰온 것인지 연주자들의 역동적인 연주가 몸동작마저도 딱딱 맞아떨어져서 듣는 것 못지않게 보는 것도 꽤 재미가 있었다.
잠시 쉬고 세 번째 순서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의 삼중주였다. 무려 40여 분에 걸쳐 베토벤의 '피아노 삼중주 7번'을 연주했다. 여기가 최대 고비였다. 곡이 너무 길기도 한 데다가 너무나도 평이한 느낌이었다. 베토벤이 위대한 음악가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고, 그중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대중적인 곡들도 많은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와 베토벤은 정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세 번째 순서가 끝나고 다시 쉬는 시간이 왔다. 드디어 곧 조성진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15분 뒤, 드디어 조성진이 등장했다.
일단은 첫 곡으로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내 막귀로는 다른 연주들과 뭐가 다른 건지 딱히 차이를 느끼지는 못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곡으로는 리스트의 곡들을 연주했다. 꽤 좋기는 했지만 리스트의 곡이 원래 좀 리드미컬하고 빠르니까 지루하지 않게 듣기 좋았던 듯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쇼팽의 '폴로네이즈' 연주가 시작되었다.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두 가지를 느꼈다.
첫 번째로, 왜 피아노얘기를 할 때마다 쇼팽의 얘기가 빠지지 않는지를 알았다. 앞선 차례들은 피아노곡이 아니었다 쳐도, 조성진이 앞서 연주한 세 곡은 모두 피아노곡이었다. 그럼에도 그냥 나에게는 그저 흔하고 평범한 피아노 소리일 뿐이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리스트의 곡 중 한 곡을 제외하면 그냥 앞의 삼중주에서의 피아노 반주와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쇼팽의 곡은 달랐다. 피아노로 소리를 꽉 채우다 못해서 마치 '피아노란 악기는 이런 거야. 이렇게 연주하는 거야.'라고 보여주기 위해 쓴 곡인 것만 같았다. 클알못인 나조차도 곡에 압도될 것만 같았다.
두 번째로, 월드 클래스 연주자란 이런 것이 다를 느꼈다. 기분 탓일 수도 있고 곡의 차이일 수도 있겠으나, 쇼팽 콩쿠르 우승은 역시나 거저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체험했다. 예전에 노래 선생님께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못주고는 결국 완급 조절에서 결정된다고 하셨던 게 떠올랐다. 그리고 조성진이 쇼팽을 칠 때의 완급 조절은 바로 그 예시에 딱 들어맞았다. 심지어 조성진 본인의 몸짓만 봐도 앞선 곡들에 비해 지금 이 곡에 혼신을 다하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에 더해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음이 울려 퍼지는 정도가 달랐다. 앞선 곡들은 그저 좀 큰 스피커로 음원을 틀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면 쇼팽을 연주할 때는 소리가 울려 퍼지다 못해서 홀이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예전에 만화 '스파이럴 추리의 띠'에서 주인공이 피아노를 연주할 때 그 소리가 건물 밖까지 퍼지는 바람에, 밖에 있던 사람이 '스피커로 틀었나?'며 의구심을 갖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에서 그 사람 옆에 있던 피아니스트가 '스피커로 튼 게 아니라 직접 연주하는 거다. 연주자에 따라 이 정도까지 달라지는 게 피아노라는 악기다.'라고 했었는데, 그 예시를 지금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연주가 끝나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그전까지는 나도 그저 예의에 맞게 박수를 칠 뿐이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나도 마음을 가득 담아서 열심히 박수를 쳤다. 조성진이 한 번 들어갔다가 다시 인사를 나올 때까지도 박수와 환호성은 멈출 줄 몰랐다.
그러자 놀랍게도 조성진이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앵콜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클래식에 대한 조예가 거의 없는 나는, 팸플릿에도 나오지 않은 그 곡이 어떤 곡인지를 알 길이 없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곡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앵콜곡이 끝나고 조성진은 퇴장을 했고, 나를 포함한 모든 관객들도 퇴장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회사에 출근해서 메신저로 사람들에게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다. 클래식에 조금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회사 덕에 공짜로 조성진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던 나를 너무나도 부러워했고, 나도 약간은 뿌듯함(?)을 느끼며 전날의 감동을 전하는데 애썼다. 그 덕에 오랜만에 사람들하고 음악얘기로 이야기 꽃을 피운건 덤이었다.
요즘은 평소와 다르게 살려고 노력 중이었다. 늘 집-회사-운동만을 반복하는 삶이 너무나도 단조롭고 무료하다 못해 거의 미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짓을 해보는데 여러 가지 노력을 쏟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무언가 새로운 만남과 감동, 재미를 느끼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번 음악회는 바로 그런 취지에 딱 맞는 행사였다. 덕분에 클래식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조성진의 연주를 실제로 듣고, 감동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래서인지 저 날의 감동은 아마 오랫동안 잊지 못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