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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Oct 26. 2022

최고의 갑질

  오늘도 나는 회사에서 갑질을 당했다. 정말로 심하게 말이다. 


  퇴근시간이 무려 20분이나 지난 시점에 고객이 나를 회의실로 호출했다. 그 고객은 나를 호출하기 조금 전에 고객사 임원에게 보고를 하고 왔다. 내가 지난주부터 만들어준 문서를 가지고 말이다. 그 문서는 사실 완성본은 아니었다. 고객이 의사결정을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걸 정확하게 적어 넣을 수는 없었고, 당연히 거기 적힌 금액도 100% 정확한 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객은 그런 것보다는 임원에게 이쁨 받는 것이 중요했기에 오차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임원에게 정확하지 않은 자료를 들고 그대로 보고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당연히 정확한 자료는 아니었기에 회의실에 앉아 있던 다른 고객이 보고된 금액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우리가 정확히 1년 6개월 전에 조사한 금액이랑 많이 다른데, 이거 어떻게 된 거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때와는 범위도 다르고요, 환경적인 면에서도 여러 가지 바뀐 면이 있습니다. 물론 그중에 통신비는 제외되어있어서 이 부분은 다시 추가로 넣어야 하는 금액이고요"

  "범위가 왜 다르죠? 이 부분도 같이 하셔야 하는 부분인데?"

  범위가 다른 이유는 간단했다. 그 사람이 지적한 부분은 원래 내가 일하기로 한 범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객들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돈을 지불했기에 그들에게 나는 응당 그들이 시키는 것은 다 해야 하는 하인 따위나 다름없었다. 어찌 됐든 왜 내가 보고서에 작성한 부분이 그들의 기대와 달랐는지 차분하게 얘기했다.

  "저희는 지금까지 앞선 견적들을 산정할 때,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부분만 가정해서 산정했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진행했습니다."

  한마디로 범위 밖의 일이니까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임원에게 보고를 하고 온 고객이 얘기 중간에 끼어들었다.

  "허허, 그럼 앞으로도 이 부분을 넣어서 반영해주시고요, 오늘 안건들은 몇 개가 더 나왔는데 그 부분들도 다다음주 보고 때 반영해주시면 되겠네요.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언뜻 들으면 인자한 인성을 가진 고객으로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레 넘어가고 회의를 종료시켰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 사람이 가장 악질인 셈이었다. 애초에 임원에게 보고할 내용은 우리 프로젝트의 범위도 아니었으며, 고객사 내에서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 전처럼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미뤄왔다. 이 사람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내 속을 모르는 그 고객은 천연덕스럽게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자, 그럼 힘들 내시고."

  가증스러운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사실 이 고객들의 갑질은 내가 겪었던 다른 갑질에 비하면 겉으로는 그렇게까지 심한 갑질은 아니라고도 볼 수도 있었다. 모 회사에서는 억지로 업무를 잔뜩 주고 트집을 잡으며 밤 11시, 12시까지 야근을 시키는 일은 다반사였다.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며 무지 성으로 다 알아서 해달라는 고객도 있었다. 이런 고객들에 비하면 이번 고객들은 어찌 보면 신사에 가까워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앞선 진상 고객들과 이번 고객들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첫째로, 앞선 진상 고객들은 업무 밖의 일을 요구하진 않았다. 나를 계속 힘들게 하고 무리한 요구를 할지언정, 그 모든 건 내 업무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성질을 억눌러가며 꾸역꾸역 일을 마무리 지었었다. 하지만 이번 고객은 달랐다. 아까처럼 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범위 밖의 일을 떠넘겼다. 임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멋대로 보고를 해놓고 뒷수습을 나에게 맡기는가 하면, 보고 문서를 작성할 때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조사해서 가져다 바치길 요구했다. 그러다 보니 억지로 일을 하는 와중에도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이건 아닌데….' 하는 회의감이 몰려왔다. 

  두 번째로, 이번 고객들 본인이 갑질을 한다는 자각이 없었다. 다른 고객들은 '미안한데…, 혹시 이것 좀 해줄 수 있어?'라며 미안해하며 일을 미룬다거나, 화를 내거나 일 폭탄을 던진 뒤에는 밥이나 술을 사주면서 사과 정도는 했다. 하지만 이번 고객들은 갑질에 대한 자각이 없었기 때문에 숨 쉬듯이 갑질을 하면서도 미안해한다거나 죄책감을 가지진 않았다. 자기들은 고객이라 응당 이런 정도의 요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속한 부서와 내가 하는 일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응당 이 일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러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우리 회사가 속한 그룹의 고객사들이 아닌, 그룹 밖의 대외 고객사에 나가서 일을 해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오랜만에 다시 그룹 내 고객사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래서 알아버렸다. 그동안 나와 내 선배들, 후배들이 힘들었던 것은 우리의 업무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룹 내 고객사들이 자각도 하지 못한 채 숨 쉬듯이 갑질을 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곤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그동안 꽤나 많은 선배들과 후배들이 업무를 견디지 못하고 전배나 퇴사를 해왔는데, 그건 그들이 나약하거나 모자라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갑놈들 때문이었던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더 이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억지로 남아서 업무 리더와 오늘 회의 때 있었던 일들(갑질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정리를 했다. 하지만 급격하게 밀려오는 회의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런 회의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집에 가서 꾸역꾸역 잠을 청해야 하고 내일 다시 출근해서 그들의 갑질을 받아주어야 한다는 현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늘은 왠지 잠을 설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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