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웹툰을 봤던 기억이 난다. 웹툰 작가는 남편과의 생활을 재미있게도 '장르'로 표현을 했다. 인생이 때로는 스릴러 같았다가도 코미디가 되기도 하고, 로맨스 같았다가도 다시 코미디가 된다며, 남편과 알콩달콩 재밌게 사는 모습을 귀엽게 표현한 것이다. 그때 나는 그 웹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인생을 장르로 표현한다면 어떤 장르일까?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장르로 표현한다면 아마 '드라마'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슬픈 드라마. 여기에 쓰기에는 너무 슬프고 아픈 얘기인지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릴 때부터 나를 알던 어르신들은 나를 보며 '용케 여기까지 잘 컸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봐도 짐작이 되리라.
그런데 아까 웹툰 작가가 말했듯 인생의 장르는 반드시 어느 한 가지로 고정되지만은 않는 것 같다. 내 인생의 장르는 기본적으로는 드라마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시트콤이 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로맨스였다가, 가끔은 스릴러가 되기도, 정말 드물게는 액션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의 인생은 어느 한 장르로 분명하게 나누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사람들의 인생을 단편적인 하나의 장르로만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구김살 없이 늘 밝게만 살아가는 친구를 볼 때면 친구의 인생 장르는 분명 하이틴 드라마일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연예인들은 삶이 늘 유쾌한 시트콤일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때로는 주변에 늘 삶의 무게에 지쳐있는 선배를 보며 신파극이거나 공포가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으며, 심지어는 나 스스로를 불행 포르노의 주인공으로만 생각할 때가 많다. 분명 내 인생의 장르가 다양하게 나뉘어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러한 순간들은 머릿속을 그저 스쳐 지나가게 놔두고, 결국에 나는 '플란다스의 개'의 네로처럼,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데도 늘 모진 풍파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죽는 그런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이런 편협한 생각이 나를 옭아매는 족쇄로 작용할 때가 많다.
구김살 없어 보이는 친구가 때로는 힘든 일에 지쳐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삶에 무게에 지친 친구가 가끔은 신나서 방방 뛰는 모습을 보일지라도, 이미 편협한 시각에 사로잡힌 내 안에서 그들의 모습은 이내 곧 내가 생각했던 그 장르의 주인공으로 돌아오곤 한다. 그러다 보니 점점 나 스스로도 나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들을 온전하게 이해해주려 하지 않고 자꾸 내가 생각한 틀에 끼워 맞추려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놀라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한번 굳어진 생각을 다시 재조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를 타파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는데, 바로 '질문'이다.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사람들은 누구나 상대에 맞춰 각각 다른 페르소나를 쓰고 대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가족들과 있더라도 부모님에겐 자식으로서의 페르소나를 쓰고 대하고 동생에게는 형으로서의 페르소나를 쓰고 대한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나를 대할 때는 각각 나와 그 사람의 관계에 맞는 페르소나를 쓴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정해진 틀 안에 고정해서 보려 하지 않음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같은 페르소나를 쓰고 나를 대하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그 사람들의 인생을 한정된 장르로밖에 접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페르소나를 당장에 벗겨낼 수도 없다. 벗겨낼 능력도 없거니와, 그들 자신이 그걸 극도로 싫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질문을 하기로 했다. 그들의 페르소나를 슬며시 빗겨나가 맨 얼굴을 살짝 쿡 찔러볼 수 있는 그런 질문들로. 예를 들어 늘 밝은 친구에게는 눈 밑이 검은걸 보니 요새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본다던가, 항상 분노에 가득 찬 선배에게 저번에 선배가 만든 보고서의 폰트가 좋았는데 어디서 구한 것인지 물어본다던가, 늘 우울한 후배에게 등산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혹시 어느 브랜드의 등산화가 좋은지 알려줄 수 있냐고 물어보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그들은 놀랍게도 스스로 그 페르소나를 조금씩 벗겨내고 자신의 본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하려 노력 중이다. 잘 안되긴 하지만.
그런데 저 질문들을 자세히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저런 질문들을 하려면 그 사람을 잘 관찰하고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사람의 페르소나를 비껴갈 질문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결국에는 그 사람의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질문을 잘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이 부족한 편이니까.
어쨌든 그래서 요새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의 인생은 어떤 장르일지를 생각해 본 다음, 그 외에 어떤 장르들이 뒤섞여 있을지를 생각해 보는 놀이를 나 혼자 몰래 해보는 중이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며 MBTI를 추측하는 것처럼. 그러면 가끔은 서스펜스 계열의 사람에게서 시트콤이 보이기도 하고 코미디 계열의 사람에게서 드라마가, 액션 계열의 사람에게서 로맨스가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그만큼 우리가 서로를 잘 알았음에 마음이 흡족해지곤 한다. 그리고 반대로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서 드라마가 아닌 다른 장르들을 찾아가는 재미를 느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 개인적으로는 내 인생의 장르를 드라마보다는 다른 장르로 바꾸고 싶은 소망이 있다.
요즘 즐겨 읽었던 만화 중에 '3월의 라이온'이라는 만화가 있다. 프로 장기 기사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변인들의 얘기가 같이 녹아있는 포근한 만화다. 거기 나오는 장기 프로들 중 최고봉인 '소야 명인'이 나온 에피소드가 요즘 유독 기억에 남는다.
소야 명인은 장기에 전념하기 위해 부모님 댁에 머물지 않고 할머니댁에 머물며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렇게 둘이 살던 집에 '왕년에 피아노 선생님이었던 할머니'의 '제자'의 '딸'이 자기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 살게 된다. 소야 명인은 아이가 시끄러울 것을 우려하여 이를 반대했지만, 소야 명인이 없을 때도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소야 명인도 안심하고 장기를 두러 갈 것 아니냐는 할머니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넷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평소에는 그 딸이 할머니 집에서 피아노 교실을 열어서 돈을 벌고 그 사이 아이는 할머니가 봐준다. 그리고 교실이 끝나면 딸은 집안일을 도와주거나 장을 보아다 준다. 그래서 그때부터 할머니를 돌봐줄 사람이 있으니 소야 명인은 안심하고 온전히 장기에만 전념한다. 하지만 소야 명인은 여전히 아이가 있어서 시끄러울 것을 우려하여 마당 한편에 방음과 단열까지 완벽하게 된 작은 집을 지어준다. 아이방으로. 그런데 정작 그 방이 맘에 든 소야 명인은 큰 집에 할머니와 딸과 아이를 놔두고는 자기가 그 방에 들어가 늘 장기 연구를 하며 지낸다. 그 모습을 보고는 소야 명인의 집에 놀러 온 장기 협회 회장과 할머니가 웃으며 말한다.
만약 내 인생의 장르를
내가 정할 수 있다면,
저렇게 슬며시 미소가 떠오르는
일상물로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