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라는 속담이 있다. 찾아보면 저 속담은 '천성이 그릇된 사람은 어디를 가든 그릇된 짓을 하기 마련'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저 속담은 '평소에도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어야 밖에서도 좋은 행동을 한다'는 뜻이라고 배워왔다. 아무래도 밖에서 책잡힐 짓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어머니의 바람대로 밖에 나가서는 최대한 책잡힐 만한 짓은 하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설령 집에서는 어떠한 안 좋은 습관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밖에서는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으려 해왔다. 하지만 괜히 저런 속담이 있는 것이 아닌 게, 그렇게 조심을 한다고는 해도 가끔은 밖에서 줄줄 새는 경우가 있곤 했다.
몇 년 전에 여자친구와 함께 백화점에 옷을 사러 간 적이 있었다. 그날 산 옷들 중에 내 바지도 껴있었다. 우리 집안은 대체로 엉덩이와 허벅지가 조금 큰 편이라 바지를 사게 되면 무조건 엉덩이와 허벅지에 맞는 사이즈를 고른 다음 수선을 맡겨서 종아리 통과 기장을 조금 줄여야만 했다. 그래서 새로 산 바지를 그대로 들고 백화점 수선집으로 향했다. 수선집 입구를 들어서니, 카운터에 아주머니 한 분 이 앉아 계셔서 주문을 받고 계셨고, 카운터 뒤쪽의 문 안에서는 여러 분들이 열심히 수선을 하고 계신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바지 수선 좀 맡기려구요."
아주머니께 인사를 하고 쇼팽백에서 바지를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어디 줄이시게?"
"종아리 통이랑 기장 좀 줄일라구요."
"그럼 입고 나와봐요"
카운터 옆에 설치된 조그마한 간이 탈의실에 들어가, 새로 산 바지를 입고 안에 놓인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아주머니께서는 핀을 들고 오셔서 바지에 꽂아 어느 정도까지 줄일지 표시를 하셨다.
"통은 살짝만 줄이면 되겠고, 기장은 복숭아뼈 살짝 걸치게만 하면 되겠네. 요새는 너무 길면 안 이쁘더라고."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다시 카운트로 향하셨다. 그리고는 이어 말씀하셨다.
"이제 벗어줘요."
그 말씀에 나는 무의식 중에 탈의실에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지를 풀었다. 그 모습을 본 여자친구가 경악하며 외쳤다.
"미쳤어?"
여자친구의 말에 문득 정신이 들었고, 아차 하며 황급히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아주머니와 여자친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속 웃고 있었다. 민망함을 꾸욱 누르며 갈아입은 바지를 카운터에 올려 아주머니께 전달했다.
"언제 찾으러 오면 될까요?"
아주머니는 계속해서 웃느라 대답을 잘 못하셨다.
"이따가…ㅋㅋㅋㅋㅋ 한…ㅋㅋㅋ 두 시간…ㅋㅋㅋ뒤에 와요…ㅋㅋㅋㅋ"
좀 부끄럽게도 나는 집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는 습관이 있다. 가족들 모두 신경 쓰지 않기도 했거니와, 혼자 산지도 오래되어서 더더욱 옷을 벗고 있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그렇다고 딱히 창문을 가리고 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그러다가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구 그래"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 대답은 "비루한 몸을 노출한 내 손해일까, 비루한 몸을 보고 눈에 충격을 받을 그 사람들 손해일까?"였다. 그러다 보니 그런 습관이 고쳐지기는커녕 계속해서 유지되어 왔고 결국 저 날 수선실에서 나도 모르게 옷을 훌렁 벗으려 한 것이었다.
나도 밖에서 새는 바가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저런 습관은 고칠 가능성이라도 있다. 당장에 의식하고 바꿀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고, 저런 습관에 대해서는 지적받거나 자각하기 쉬우니까. 하지만 그 외 습관들을 고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소위 서른 살이 넘으면 그때부터는 삶의 방식이나 습관을 고치기 힘들다고 한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몸에 배어 고치기도 힘들거니와 남들이 지적해 줄 나이는 지났기 때문이다. 나만해도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언행에서 잘못된 점이 보이면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잘못되었다고 얘기해 주곤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말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데 굳이 만났을 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내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거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또한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업무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당연히 그 사람들과는 비즈니스 적인 관계이기도 하기에 절대로 지적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을 피하면 피했지.
그래서 요새는 자꾸만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무언가 남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날이 있었다거나 괜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좀 많이 느껴졌다 싶은 날이면, 내 언행의 어딘가가 잘못된 게 아닌지 걱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을 알려줄 사람도 없거니와, 주변인들에게 물어본다 한들 그 자리에 직접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원인을 파악해주지도 못하기에 스스로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다고 다짐만 하곤 한다.
그러니 이제는 오히려 잔소리해 주던 사람들이 조금은 그리워진다. 물론 막상 다시 잔소리를 듣기 시작하면 다시 몸서리치면서 그만하라고 할 것이 뻔히 보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립다. 어딘가 유튜브였던가 TV였던가 에서 들었던 얘기가 있다. PT는 운동에 대한 것을 배우는 것이기도 하지만 잔소리해 달라고 돈을 내는 것이기도 하다는 얘기였다. 나이가 들면 어릴 때와 반대로 잔소리를 해달라고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돈을 내고 PT를 받는 입장으로써 참 공감 가는 말이었다. 사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적절한 비용만 지불한다면 잔소리라는 서비스를 적확하게 제공해 주는 것이니 어떤 면에선 편해졌다고 볼 수도 있다. 내가 잔소리가 필요할 때 비용을 지불하면 되고, 더 이상 필요 없다 싶으면 수강을 하지 않으면 되니까. 어떻게 보면 자기 선택권이 확대된 것이고 스스로의 의지로 잘 조절할 수 있게 된 것이므로 꽤나 긍정적인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애정에 기반하여,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나를 위해 종알거려 주던
그 잔소리가 그리워지곤 한다.